[류병학의 사진학교]27

August Sander_coalman. 1929

필자는 지난 연재에서 박물관이 예술작품의 제의가치를 전시가치로 전이시켰다고 말했다. 그 점에 대해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예를 들면 어떤 신상(神像)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고 있고, 어떤 성모상은 거의 일 년 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또 중세 사원의 어떤 조각들은 지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박물관으로 자리바꿈되면서, 그것들은 "제각기 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활동의 산물들이 전시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흉상(胸像)의 전시 가능성은 사원 내부의 일정한 장소에 붙박혀 있는 신상의 전시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크다. 패널화(Tafelmalerei)의 전시 가능성 역시 그에 앞섰던 모자이크나 벽화의 전시 가능성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흉상과 패널화는 사원 내부에 붙박혀 있는 신상이나 모자이크 그리고 벽화보다 박물관으로 운반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벤야민의 목소리를 빌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면, 최초로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박물관이 등장하면서부터 의식의 대상이었던 예술은 변모하게 된다. 예술은 예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을 통해 '순수예술'의 이념이라는 형태를 띤 일종의 부정적 신학을 탄생시킨다.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의가치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제의가치는 최후의 보루로 물러서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그 초창기에 초상사진이 사진의 중심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이미지의 제의적 가치는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거의 의식적인 행동에서 마지막 도피처를 찾았다. 초기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에서이다. 초기 사진에 나타나는 멜랑콜리하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비결은 바로 이러한 아우라이다."

필자는 지난 연재들에서 벤야민이 일종의 '훈련용 지리부도'로 보았던 잔더의 인물사진들을 단편적이나마 살펴보았다. 필자는 잔더의 '시대의 얼굴'에 담겨진 20세기 60명의 독일인들이 당시 독일사회에서 저마다 역할을 맡고 있는 사회구성원들로, 그들의 모습은 그들에게 유리하건 그렇지 않건 후세로 물려주어 역사적인 증언가치를 갖게 되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복제기술시대의 사진작품인 잔더의 인물사진들은 역사적인 증언가치를 지닌 인물들의 영역에서 떼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떼어내어질(사라질) 전통의 영역을 후세에 남겨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사진작품은 사진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사진작품이 담고 있는 장소를 '유일성'이 아닌 '복제성'을 통해 현존재를 민주적으로 알려준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증언가치를 지닌 잔더의 사진작품은 아우라를 숨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오늘 필자는 여러분들에게 잔더의 사진작품 한 점을 제공해 드리겠다.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잔더의 사진작품은 여러 지역에 '배달(전시)'되어 사진계에 잘 알려진 잔더의 '석탄배달부(coalman)'(1929)이다. 자, 여러분, 잔더의 <석탄 배달부>가 역사적인 증언가치를 배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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