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춥고 길수록 오는 봄이 더 푸르다고 했던가. 벌써 마당의 목련 꽃망울이 제법 도톰해진 것 같다.
 이렇게 나른한 주말의 오후엔 누워 있기도 무료해 창고와 욕실에 아무렇게나 포개 둔 꽃나무와 화분을 꺼내놓고 물을 주며 손질을 해본다.
 생명이 움돋는 초봄이 되면 초등학교 시절 심한 빈혈로 학교를 오갈 때 하늘이 노오래 종종 길섶에 주저 앉았던 아픈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하긴 그 시절 여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만 지척에 있는 양옥집 담장 너머엔 개나리가 한창이고 화단이라야 고작 꽃나무로 철쭉과 박태기나무 몇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저 집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사람들이려니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소심한 성격 탓에 신문뭉치를 든 열다섯 살의 나는 누가 알아 볼세라 교모를 푹 눌러쓰고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때만 해도 비닐이 귀해 비가 오는 날도 신문이 젖지않도록 봉투에 넣어 돌리는 요령을 몰랐다.
 꼭 철대문이 있는 그 집에 가면 초인종을 누른 다음 주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신문을 직접 전달해야만 했다.
 그날 따라 목련 꽃봉오리가 마악 벙그는 데 봄비가 질척대며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예닐곱 집이나 더 남았는 데 나는 노박이를 한 채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대부분 이럴 경우 무표정한 중년부인이 나오기 일쑤였는 데 웬일인지 박꽃처럼 얼굴이 흰 내 또래의 여학생이 가만가만 나왔다. 그리고 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쓸만한 우산 하나를 건네주며 "이거 쓰고 가세요. 그리고 도로 가져오지 않아도 돼요"
 용기없는 난 결국 여학생이 준 우산을 돌려주지 못했다.
 이미 아람드리가 되었을 목련나무 그 옛 골목이 이제 다시금 생각나는 것은 비가 내리는 탓일까? 아니면 나처럼 중년을 훌쩍 넘어선 소녀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오늘도 목련꽃 피어 날 그날을 기다리며 난 뿌리를 다듬는다. / 충일중학교 행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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