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을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가는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2017.05.23. / 뉴시스

어제는 2명의 전직 대통령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미결 수용자 신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식 재판이 시작된 날이자 고(故)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8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이들은 이념적인 성향은 전혀 다르지만 모두 국민들의 환호 속에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임기말년은 둘 다 비극적이었다. 한 사람은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헌법재판소로 부터 파면당해 영어(囹圄)의 몸이 됐고 또 한사람은 고향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절대권력'에서 내려와 '정치적 약자'로 신분이 바뀐 전직 대통령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권력형 비리와 정치보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경제선진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정치는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것을 웅변했다.

박 전대통령은 대기업에서 총 592억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약속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이후 36일 만에 다소 초췌한 모습으로 법정에 등장했다. 전직 대통령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것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최순실씨와 뇌물공여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 회장도 나란히 피고인석에 앉았다. 언론은 이들과 함께 재판을 받은 박 전대통령이 '긴장한 듯 시종 굳은 표정이었고 한두 차례 한숨을 내쉬거나 목이 타는 듯 물을 들이켰다'고 보도했다. 제왕적인 권력을 가진 대통령도 권력을 남용하거나 법질서를 무너트린다면 수의(囚衣)를 입을 수 있다는 준엄한 법치를 보여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뇌물과 직권남용 등 범죄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촛불집회를 앞세운 국민적인 저항과 국회 탄핵, 헌재 탄핵인용의 참뜻을 아예 모르거나 알고도 외면하는 듯 하다. 지난 4년의 국정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같은 날 노 전 대통령 서거 8주기가 열린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은 아침 일찍부터 추모열기로 가득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했다. 정권재창출에 실패하면서 부침(浮沈)을 거듭하다 마침내 이번 장미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자 친구인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서 숙원이었던 정권교체를 이뤄낸 친노진영에겐 뜻깊은 날이었을 것이다. 노 전대통령도 새삼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정권의 파워그룹으로 부상한 친노진영은 노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문 대통령 국정운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박 전대통령 재판과 노 전대통령 서거 8주기 행사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대선에서 이겼다고 영원한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2007년 12월 친노세력의 처지를 '폐족'에 비유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노를 주축으로 한 진보세력은 다시 일어났고 박근혜로 상징되는 보수세력은 분열되고 추락했다. 역사는 돌 고 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출범이후 탕평인사와 소통행보로 높은 지지율은 물론 국정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권력'을 지나칠 만큼 파헤치는 것은 자칫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실패한 정치에 대한 교훈을 잊는다면 개인과 계파와 집단의 패배가 아니라 국가가 흔들리고 국민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우리 정치사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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