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전섭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둘째 아이 시집가던 그날도 꽃비가 흩날렸다. 누이의 탐스러운 얼굴 같은 꽃송이들이 누우며 꽃길을 만들었다. 봄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진한 찔레꽃 향기가 피어오르고, 온몸을 저리게 한 꽃물결이 뜰 안 가득 넘실거렸다. 건너편 솔밭 능선에선 새끼를 부르는 뻐꾹새의 애절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둥지를 떠나보내는 아비의 마음을 알았는지 모란은 설움에 겨워 붉은 꽃잎을 떨구었다. 가는 봄은 지난 세월의 애틋한 그리움을 토해냈다.

"아빠, 엄마! 잘 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문밖을 나서는 딸이 눈물을 글썽이며 와락 품에 안기며 속삭인다. 분신 같던 딸아이가 신행길 떠날 때까지는 덤덤했다. 잠시 여행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딸 내외가 손을 흔들며 마을 어귀를 돌아 눈앞에 사라졌을 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래, 잘 살거라, 잘 살거라"라고 되뇌며 손짓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서러운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뒤꼍으로 갔다. 담장가 쥐똥나무를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던지 두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속울음이 터져 나와 어깨를 들썩이며 아마도 눈물 한 동이는 뿌렸으리라. 그날따라 새끼 잃은 오목눈이새는 빈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왜 그리 애달프고 처량하게 울어대던지…….

그날부터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던 날까지 딸아이 방에 백열등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방문도 닫지 않고 내내 열어두었다. 침실의 이불과 베게, 살림살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뜰팡에 나가 무량하게 쏟아지는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낸 적도 적잖았다. 그래도 보고픈 마음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를 땐 정원을 거닐며 밤이슬에 심란한 마음을 삭혔다.

금방이라도 딸이 배시시 웃으며 방문을 열고 달려 나올 것 같은 나날이었다. 살갑게 나를 부르던 딸아이의 환청과 환상이 사라지고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살랑거리고 보랏빛 용담꽃이 하늘을 품고 부활할 무렵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달도 차면 곧 이지러진다. 꽃이 피고 짐이 자연의 순리이듯 사람이 오고감도 세속의 이치이다. 꽃이 지면 또 다른 꽃들이 향기를 품으며 지는 꽃의 존재를 잊게 하듯 세월은 별리의 아픔을 치유해 준다. 딸아이를 향한 그리운 마음과 가슴의 멍울을 지워낸 건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다. 망각의 늪을 건너게 하고, 기다림과 환희의 기쁨을 안겨준 것도 세월이리라. 돌이켜보면 세월은 보약이고 영양제임을 깨닫는다.

어머님은 봄꽃이 필 때면 더욱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살피꽃밭에 당신께서 좋아하는 봉숭아꽃을 심거나, 막걸리 한잔에 취기가 돌면 눈물을 훔쳐내며 외할아버님과의 추억을 풀어 놓았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오남매 중 맏이였던 어머님을 무척이나 아끼며 집안의 기둥처럼 의지했다. 술을 좋아했던 분이라 낮술이 생기거나 생각나면 인편을 통해 어머님을 불렀다. 노년에는 부녀지간에 술벗으로 지내면서 참 다정하게 지냈지 싶다. 호랑이처럼 엄하고 불같은 분이지만 큰딸에겐 무척이나 자상하고 살가운 아버지였다.

시골집과 외갓집은 야트막한 산을 두어 고개만 넘으면 되는 거리였다. 지근거리지만 그 시절엔 사돈댁 마을에 가까이 가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한번은 시집간 큰딸이 하도 그립고 보고 싶어 새벽 댓바람에 슬그머니 논에 가는 양 집을 나섰단다. 혹여 동네 사람들이 볼까봐 먼발치에서 물 긷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가셨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종갓집 시집살이하는 맏딸이 안쓰럽고 가슴 아프셨으리라.

딸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똑같지 싶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셨던 외할아버님과 너무나 닮아 있다. 외할아버님은 딸자식을 대하는 방식이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난 다정다감하며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노년에 어머님은 마음이 울적할 때나 외로울 때면 외할아버님을 그리워하며 흐느끼셨다. 세월이 흘러 내 딸아이도 나를 그리워하며 훌쩍거릴지 모르겠다.

활어 떼 마냥 팔딱이던 봄이 가고 있다. 하르르 피었다가 무심결에 허무하게 지는 꽃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새 생명을 잉태한다. 딸아이의 회임 소식이 꽃바람에 실려 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손주 녀석이 일어서기에 성공했단다. 상기된 사위 목소리가 전화기로 들려온다. 아내의 입이 귀에 걸린다. 연어가 모천의 물때를 핥으며 본능적으로 회귀하듯 주말에 친정 나들이를 준비하는 딸아이의 들뜬 모습이 선하다. 집안 분위기가 꽃보다 더 환하다.

이층 딸아이 방을 열어 본다. 주인 없는 방은 온기를 잃은 채 새끼 쳐 나가버린 새들의 빈 둥지처럼 휑뎅그렁하다. 북향의 창문을 활짝 밀치니 꽃멀미가 날 정도로 진한 쥐똥나무꽃 향기가 방안 가득 밀려온다. 딸아이 부부와 외손주를 위해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닦는다. 제법 정갈하게 마련된 둥지는 활기가 넘치고 평안한 느낌이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적막했던 집안이 북적거리며 사람 사는 냄새가 꽉 채워지리라. 이미 내 귓전에는 외손주 녀석의 재롱으로 인향만정(人香滿庭)의 웃음소리가 진동한다.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 청주문화원 이사
▶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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