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근 前 옥천문화원장, '제1회 지용제' 유치
'추모제'에서 '문학축제'로 발전시킨 업적 빛나

[중부매일 윤여군 기자]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 밖에"

정지용의 시 '호수'의 구절이다.

제1회 지용제를 유치한 박효근(76) 전 옥천문화원장이 푸르른 5월 지용문학공원을 거닐며 조릴 정도로 가장 사랑하는 시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그의 시처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지용제.

지용제 30주년을 맞은 박효근 전 원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30년 전인 1988년 월북 작가의 오명을 벗고 정지용 시인이 해금되던 해 서울에서 첫 지용제가 열렸다.

'판금'의 서슬 앞에 그를 기억하는 모두가 30여년을 숨죽이며 기다려 해금을 맞은 1988년 4월 1일, 시인 정지용을 흠모하던 김수남, 박두진, 구상, 김남조, 유안진 등 시인과 문학인이 모여 '지용회'를 발족하고 그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제1회 지용제'를 열었다.

그때 초청을 받은 박효근 원장은 지용제를 옥천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역설해 제1회 지용제를 어렵게 유치했다.

그는 "지용제는 서울에서 할 일이 아니다, 고향인 옥천에서 해야 된다"고 주장해 정지용 시인의 생일인 5월 15일에 서울에서 열린 뒤 한달 뒤인 6월 25일 납북의 의미를 새겨 옥천군에서 제1회 지용제를 개최해 첫 해 2회의 지용제를 열었다.

박 원장은 "어렵게 제1회 지용제를 옥천에서 개최했지만 보수단체들의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관내 기관장들도 행사 참석을 외면해 조촐하게 치를 수 밖에 없었다"면서 "하지만 30년이 흘러 제대로 갖춰진 지용문학공원에서 30주년 지용제를 개최한 것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제1회 수상자인 고(故) 박두진 선생과 구상 선생이 "지용제를 옥천에서 개최하도록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했던 격려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박 원장은 "5월이 되면 고마운 분들을 잊을 수 없다"면서 고인들도 30주년 지용제를 흐믓해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장은 정지용의 시로 만든 가곡 '고향'을 즐겨 불렀던 절친이자 지용 시를 사랑한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 그리고 김성우 한국일보 고문, 고 김수남 전 색동회 회장을 지용제라는 문학축제가 만들어 지기 까지 잊을 수 없는 잊어선 안되는 인물로 꼽았다.

1987년 5월부터 2001년 3월까지 14년 동안 10, 11, 12, 13대 옥천문화원장을 역임한 것은 지용제를 발전시키라는 숙명이었다.

당시 박효근 문화원장이 없었다면 지용제는 서울에서 개최되다 문인들만의 행사로 명맥을 유지했거나 세월속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를 기리는 추모제에서 문학축제로 발돋움한 지용제를 문학이라는 차별화된 콘텐츠로 30년 동안 문학축제로 발전시킨 것은 고향인 옥천군민의 자부심없이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인 옥천군에서 개최한 지용제는 지역민들과 문학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생가 복원을 비롯해 문학관을 만들고 급기야 정지용문학공원을 조성해 문학축제가 갖춰야할 인프라를 완성했다. 이같은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의 지용제는 전국의 문학인 등 6만여명이 방문하는 대한민국 대표 문학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지용제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며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정지용을 추모하고 시문학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뜻으로 매년 5월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詩끌벅적 감동 30년'이란 주제로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전국 동호인, 학생 등이 참여해 서른 번째 지용제를 축하하며 정지용 시인의 시성을 기렸다.

'향수'를 통해 우리민족의 이상적 공간을 그렸던 정지용. 우리역사의 질곡은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을 노래하게 한다.

일제 강점기는 그에게 '친일시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으며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돈은 그를 방황케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는 아예 그를 '월북시인'으로 낙인찍어 그와 그의 문학을 묻어버렸다.

지용제가 올해 30년을 맞아 박효근 전 문화원장의 빛나는 문학적 업적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유산이다.

1995년 지용생가 복원과 1989년 지용시비 제막, 1990년 지용흉상 제막, 1997년 연변지용제 개최, '지용로' 도로명 명명 등 수많은 일들을 거침없이 해냈다.

지용생가가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박 원장은 이를 방치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모금운동을 벌여 이 생가를 매입했고 이를 복원해 많은 문인들에게 그를 추모하는 그리운 향수의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에서 문인들이 남산에 지용시비를 건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용시비 1호는 반드시 고향인 옥천에 건립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리산국립공원에서 돌을 골라 옮겨와 평보 성희환의 서체로 새겨져 지금의 관성회관 옆에 건립했다.

이 시비는 현재 국내 유명한 시인들의 시비 중 가장 아름다운 시비로 인정받고 있다.

지용흉상은 서울대 박인수 교수와 가수 이동원씨가 정지용의 '향수'를 불러 마련한 수익금으로 체육공원에 세워졌다.

정지용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지용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 연변지용문학상을 비롯해 청소년 문학상 등 문학상 제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30살 청년이 된 지용제에 대해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그는 "문화원장 재직시 1994년 구읍 전체를 지용의 시심이 우러나오는 테마마을로 조성하고 싶었다"며 "이와 함께 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용초로 병칭을 변경하고 지금의 관성회관을 지용회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싶었지만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못내 아쉬워 했다.

박효근 전 문화원장

박효근 전 원장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청년기를 맞은 지용제는 지역주민과 문학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정지용 삶의 향기를 더욱 가까이 하고 그의 문학을 접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문학축제로 자리잡았다"며 2년전 구읍일원에 지용문학공원을 조성해 대한민국 대표 문학축제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한 김영만 옥천군수와 김승룡 문화원장의 노력에 고마움과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내남면 상계리(현 옥천읍 향수길 56) 아버지 연일정씨(延日鄭氏) 태국(鄭泰國)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 미하(鄭美河)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1910년 4月 6日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서 1918년 휘문보고(徽文高普)에 입학한 뒤 이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2月 '서광(曙光)' 창간호에 자전적 성장이야기인 소설 '삼인'을 처녀작으로 '요람(要籃)' 동인 지를 김화산, 박팔양, 박소경 등과 함께 주도했다.

1923년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 입학해 1929년 동지사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 문예지(文藝誌)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일본어로 된 시들도 많이 투고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북원백추(北原白秋)의 관심을 받았다.

동지사대학 영문과 졸업.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 시 '유리창'을 썼고 1930년 김요량, 박용철과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 1930년대 시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1935년 제1시집 '정지용 시집(鄭芝溶詩集)'을 시문학사에서 출간했고 1939년 '문장'지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돼 서대문 형무소에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돼 평양 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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