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상 온 몸으로… 진한 향기 가득

사진/ 홍대기

동트자마자 상당산성을 올랐다. 굽이진 노송들 사이에서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소나무 숲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시절에는 앞산 뒷산 할 것 없이 온통 소나무 숲이었다. 꽃이 피고 녹음 우거지며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벌거벗은 채 북풍한설을 버티는 다른 나무와 달리 소나무는 계절이 바뀌어도, 거센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쳐도 변함없이 푸른 기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소나무 앞에서 고립돼 있을까.

사진/ 홍대기

처음에는 바람소리인 줄 알았다. 언제나 이 길을 지날 때는 바람 섞인 차가운 소리가 귓불을 때렸다. 나는 그것이 햇살과 바람이 합궁을 하거나 소나무 숲에 숨어있던 바람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삶이 신산하거나 방랑자처럼 막막하면 그 소리는 더욱 깊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소나무의 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진 세월 아픔을 견디며 흘러나오는 미세한 떨림 말이다.

소나무는 눈보라와 태풍과 마른장마와 천둥번개 같은 공포의 시간을 견디느라 온 몸이 부르트고 갈라져도 군말 한 번 하지 못했다. 이따금 나무꾼이 서슬 퍼런 도끼나 날카로운 톱을 들고 서성거릴 때는 오금이 저려 죽는 줄 알았다. 등산객은 오가면서 침을 뱉고 잔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으며 돌팔매질을 하거나 발길질도 서슴치 않았다. 그때마다 온 몸이 찢기도 멍들어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참고 견뎌야 했던 것은 숲속의 친구들을 생각했기 때문이고, 천 년을 외마디 비명 없이 견뎌온 성곽 때문이었다.

사진/ 홍대기

세월의 풍상을 견뎌낼 때마다 상처가 하나씩 생겼다. 어떤 소나무는 아픔을 참지 못해 옹이 지고 뒤틀리기도 했으며, 다른 소나무는 사찰의 배흘림기둥이 되어 모란 무늬로 남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소나무는 마른 장작이 되어 캠핑장의 불쏘시개로 활활 타오르기도 했으며, 청춘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모닥불이 되거나 세상 사람들의 삶을 디자인하는 가구로 변신하기도 했다. 견딤이 쓰임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다.

사진/ 홍대기

나는 현실을 사랑한 적이 없다. 반항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달려왔다. 이따금 욕망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구린내로 가득하며 회색도시의 골목길에서 청춘을 방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소나무숲과 말없이 억겁을 견뎌온 성곽 앞에 서면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 "삼한의 등뼈인 상당에서, 백제의 옛 성이 으뜸이라. 허공에 광채 나더니, 달 떠오르자 계수나무 흐르네." 조선의 문인 변시환은 이렇게 삼한의 중심이 청주라고, 청주에서도 상당산성이 으뜸이라고 했다. 역사가 남긴 진한 향기 끼쳐온다.

빗살무늬토기를 사랑했던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은 삶의 전장이었다. 백제인들도 이곳에서 집을 짓고 보름달을 노래했다. 통일신라 때의 유물도 출토되었고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아들 원정을 따라온 구근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밀려 충청병사에 부임한 원군이 상당산성을 고쳐 쌓았다. 상당산성은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 형태다. 소나무 숲과 계곡과 성안의 마을과 우물과 맑은 햇살이 그 역사의 증인이 되고 있다.

사진/ 홍대기

임진왜란을 겪은 조정이 한양을 지키기 위한 보루로 여러차례 고쳐 쌓으면서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다.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란) 때 청주읍성의 병영을 장악한 반군이 이곳으로 돌진해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도 했다. 한 때는 66칸의 구룡사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청주는 정치적, 군사적 전략지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삶의 전장이다.

4.2㎞의 성곽은 낮고 느리며 두텁다. 성곽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은 환생과 순환의 기나긴 여정의 벗이다. 춥고 배고픈 시대를 살아서일까. 신산한 삶을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늘도 성곽을 따라 걷는다. 소나무 숲의 진한 향기를 품는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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