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 사이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찬가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일이 몰리고 삶이 팍팍하면 악몽에 끄달린다. 마음의 일은 때때로 몽매하고 정처 없어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틈도 없이 식은땀이 온 몸을 찌르기도 한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내 삶을 위로하고 아픈 곳을 치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쁠수록 쉬어가고 더디더라도 반듯하면 될 것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삶의 여백과 향기를 찾아 나서자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것은 노마드(유목민)의 삶 속에서 자족했던 시대였다. 남아프리카 반투어 계열의 단어 중에 '우분투'가 있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노마드는 공동체적 가치와 생명의 소중함을 중시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과 더불어 자박자박 꿈을 향해 걸어간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자연은 서두르지도 자만하지도 않는다. 꽃과 나비와 바람과 햇살 모두 엄연하지만 우열이 없다. 빛나는 풍경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운 찬가를 부른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여름의 숲은 크고 깊으며 진하다. 나무들은 뿌리 끝까지 숨을 몰아 쉰 다음 몸 밖으로 힘차게 내뱉는다. 온 산하가 출렁거리고 나그네의 마음 깊은 곳까지 현기증이 밀려온다. 다른 미생물로부터 자기 몸을 방어하기 위해 식물성 살균 물질을 발산하는 것이 피톤치드다. 공기 중의 세균이나 곰팡이를 죽이고, 나무에게 해로운 곤충의 활동을 억제한다. 반면에 테르펜은 식물체의 조직 속에 있는 정유 성분이다. 편백, 화백, 잣나무, 소나무 등 바늘잎나무에 많이 있는데 마음의 평온과 스트레스를 없애준다. 이처럼 식물의 들숨과 날숨은 생존의 전략이자 배려의 미덕이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가 기지개를 펴더니 한 순간 꽃을 피우고 잎을 키우며 향을 만든다. 송홧가루 휘날리는 5월의 숲을 지나 녹음으로 우거진 6월의 수풀로 들어간다.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해 있다. 두 발로 걸어야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다. 오감을 온전히 열어 놓고 가쁜 숨과 땀방울을 흘려야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를 하나씩 보여준다. 여름은 초록과 햇살과 바람 사이로 소리가 있고, 그 사이에 침묵이 있다. 기다릴 줄 알아야 숲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즐길 수 있다. 가던 길 멈추고 숲속에서, 계곡에서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기며 고단했던 마음 부려놓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새살 돋는 희열로 가득하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수목원은 수천 년의 풍상을 이겨 낸 삶의 아름다운 흔적으로 가득하다. 알 수 없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무디어진 촉수를 일깨우고 원시에 대한 숨은 감각을 일깨우며 우리 몸 안에 내재돼 있는 자연성을 일깨운다. 내 들숨의 산소는 나무들이 만든 것이며, 날숨의 이산화탄소는 나무들의 식량이 된다는 뿌듯한 자각의 순간 오르가즘을 느낀다. 나도 쓸만한 존재라는 사실에, 너와 내가 하나라는 벅찬 감동을 즐긴다. 게르만 민족이 숲이라는 단어를 성소(聖所)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수천 년 품어온 자연의 향기를 맡는다. 시공을 뛰어넘는 영적 교감이 감미롭다.

미원은 평온해 보이지만 거친 역사의 현장이며 억겁의 상처와 생명의 가치로 가득하다. 구석기 시대의 빛살무늬 추억에서부터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서로 교역을 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치열성의 현장이다. 물길 깊고 숲길 또한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름진 농토에서는 풍요를 노래했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하여 미동산수목원은 삶의 최전선에서 피땀 흘린 자들의 쉼터다. 꽃처럼 나비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 몸과 마음 부려놓고 삶의 여백을 즐긴다. 순수의 맛, 원시의 풍경을 담는다.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해 있으니 더욱 값진 여정이 아닐까. 느리게 가라. 시간에 떠밀리지 말라. 자연의 은밀함을 즐겨라.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의 자연예찬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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