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요즘 우리집 골목길 계단은 온통 멍투성이다. 뽕나무 한 그루에서 떨어진 오디가 시퍼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난 어릴 적에 오디를 뽕이라고 불렀다. 그땐 몰랐지만 요즘 오디를 보면서 김세레나의 '뽕따러 가세' 란 노래와 함께 둥그런 레코드가 생각났다. 까만 판에 동글동글 물결무늬가 있는 레코드는 참 신기하기만 했다. 초등학교 5학년쯤인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장롱 반만 한 전축을 사오셨다. 처음에는 정말 장롱인줄 알았다. 자개농처럼 문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르륵 양쪽으로 문을 열면 그 속엔 턴테이블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레코드를 몇 개 얻어 오신 듯싶었다. 이미자의 '한강수 타령'과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조미미의 '서산 갯마을'과 김세레나의 '뽕나러 가세' 등 몇 개가 있었다. 살짝 바늘을 올리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까만 레코드. 아버지는 아침이고 밤이고 시간만 나면 노래를 들으셨다. 그리고 노래를 따라 부르셨는데... 잘 못 부르셨다. 거의 높은 음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노래사랑에 나도 모르게 레코드의 노래를 외우게 되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뽕따러 가세, 뽕나러 가세. 앞뒷집 큰 애기야...."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노래가사만 따라 불렀지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다. 단지 어린마음에도 나훈아의 '가슴 아프게'란 노래는 조금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직직 거리며 돌아가는 까만 레코드. 어떻게 그 까만 줄과 줄 사이에 노래가 숨어 있을까? 신기했다. 6학년 때인가, 소풍을 가서 아무도 모르는 이미자의 한강수타령을 불렀다. 다들 동요를 불렀는데...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앙코르까지 받아 군밤타령도 불렀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가수는 다 트로트와 민요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혜은이 라는 가수를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혜'씨 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니... 모든 게 신기했다.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간신히 혜은이의 노래가 담긴 레코드를 샀다.

그리고 그중 좋아하는 노래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다가 혹시 레코드가 한 쪽만 푹 파이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레코드 속에 어떻게 노래가 들어가 있을까? 내 생각엔 노랫말이 숨어있어 탁탁 흔들면 글자들이 툭툭툭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글자는 안 나오고 팔만 되게 아팠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그 후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작은 커피숍을 하게 되었다. 그때 다시 레코드를 하나 둘 사 모으게 되었다. 얼마 후 시디가 나왔지만 이사를 몇 번 하면서도 그 레코드를 잘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 얼마 전 한 카페에 갔더니 직직거리며 레코드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오래 전 듣던 노래도 들려주면서. 요즘은 다시 아날로그 음반의 부활이 눈길을 끌고 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서 빠름의 시대에 휴식을 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회가 된다면 뽕~따~러 가세~를 부르며 실력발휘를 해봐야겠다. 하지만 혹여 내 노래를 들은 뽕나무가 큰 충격으로 후두둑 계단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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