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로 스며들 때의 설렘, 깊고 푸른 신세계에 대한 그리움

눈에 밟힐 듯 선하다. 눈발 흩날리며 달리던 그 길, 연둣빛 잎새 가슴에 품고 설렘으로 피어오르던 그 날, 진한 초록의 수풀 사이로 쏟아지던 햇살,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 둘 떨어질 때 사랑하던 내 님도 멀어져 간 그날의 슬픈 기억.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라고 노래한 시인도 있지만 찰나의 아픔과 벅찬 감동을 가슴에 묻고 그리움으로 살지 않던가.

청주의 관문 가로수길은 색의 전장이며 그리움의 진원지다. 깊고도 진하며 느리지만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른 색의 원시성을 담고 있다. 순백의 미를 뽐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새순 돋는 처녀성을 자랑한다. 만화방창 생명의 낙원이 시작되면 이곳은 앞다퉈 진한 물감질을 한다. 햇살에 눈부시고 푸른 기상에 마음 젖는다. 찬바람이 불면 나무는 하나 둘 자신의 모든 것을 떨구고 비운다. 흩날리는 낙엽은 정처 없고 미련도 없다. 낙하의 비명도 눈물도 없다. 그 속으로 이름 모를 차들만 쾌속 질주할 뿐이다.

색의 마술사 이브 클라인. 나는 여름에 이 길을 지나면 이브 클라인의 울트라마린(Ultramarin)을 생각한다. 진하고 깊은 색, 모노크롬 블루의 단색이지만 그 속에서 현대의 행위예술과 팝아트의 진한 맛을 짜 낸다.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농후한 예술세계를 펼친다. 도발적이고 환상적이며 신비로운 존재감까지.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감동을 한다. 인간의 예술적 행위는 모두가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가로수길을 지나면 펼쳐질 신세계가 앙가슴 뛰게 한다.

사람이든 도시든 첫 인상이 중요하다.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운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연필을 깎듯이 무디어진 자신을 매일매일 소리 없이 다듬어 가는 것. 내 영혼의 촉수를 살리고 내 삶의 아픈 기록을 간직하며 내 생명의 근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인상은 이렇게 깎고 다듬고 견디며 만들어진다. 도시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첫 인상, 첫 만남, 첫 사랑이 중요하다. 낯선 도시로 스며들 때의 설렘은 그래서 값지다.

청주가 생명문화의 도시라는 사실은 맑고 향기로운 가로수길, 시원스레 뻗은 진입로의 풍경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도시를 가면 뭔가 재미있는 일, 행복한 일, 살가운 일이 생길 것 같다. 크리에이터 이어령은 청주야말로 지구상 유례없는 생명의 보고(寶庫)라고 했다. 그 생명의 가치는 가로수길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인 소로리볍씨, 절멸 위기의 두꺼비 서식지를 시민의 힘으로 살려낸 두꺼비생태공원, 태교신기와 명심보감과 직지와 세종대왕 초정르네상스, 오송 바이오와 오창 생명농업. 그래서 당신은 "청주가 하면 세계가 할 것이고, 청주가 하지 못하면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할 수 없으니 생명문화의 돛을 올리자"고 웅변했다. 가로수길의 수천 개 나무 하나 하나에 시민들이 문화적 온기를 만들어 주고, 세살마을과 디지로그 생명마을을 만들며, 시민스토리박물관도 만들자고 했다.

청주의 동쪽에 우암산과 상당산성이 있고 서쪽에는 부모산과 부모산성이 있다. 부모산은 가로수길이 끝날 무렵 좌측에 펼쳐진 낮은 산이다. 옛날에는 아양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산 정상에 모유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은혜로운 우물'이라는 뜻이다. 왜적이 침입하였을 때 산성에 오른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줬다는 전설이 있다. 1㎞가 넘는 성곽은 신라가 처음 쌓았지만 백제가 탈환한 뒤 다시 축성했다. 삼국의 항쟁 속에서 부모산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부모산에서 보는 가로수길은 호젓하고 도시는 넉넉하다.

예나 지금이나 청주는 현실에 안주한 적이 없다. 도전과 저항과 새로움을 향한 가슴뛰는 일들을 모색해 왔다. 흙 속에 저 가로수길 속에 도시의 풍경 속에 진한 생명의 향기, 삶의 온기 끼쳐온다.

가로수길 / 중부매일 DB
복숭아밭 / 홍대기(사진작가)
소나무 숲 / 홍대기(사진작가)
여름 숲 / 홍대기(사진작가)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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