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의 위대한 삶과 정신, 오롯이 담겨

간디는 원칙없는 정치, 노동없는 부, 양심없는 쾌락, 인격없는 교육, 도덕없는 경제,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없는 신앙이 사회를 망친다고 했다. 80년 전의 일인데 지금 우리 사회에 주는 경고이자 성찰의 메시지다.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행복, 자유, 미덕 세 가지를 주목하며 의무와 권리가 선행되지 않는 그 어떤 결과물들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욕망과 사적 견해를 앞세운 것들은 그 결과가 선하고 풍요로울지라도 공공의 이익과 번영에 위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일제에 대항해 싸우던 의열단을 모델로 한 영화다. 펄럭이는 코트자락, 꼬나문 담배, 허공을 날며 쏘아대는 권총, 슬로우 모션으로 쓰러지는 남자들. 3·1운동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단체가 필요했다. 이들은 요인 암살과 주요 시설 파괴라는 행동을 감행해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시회사·식산은행·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등 그들의 활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한국인단체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긴장과 불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까. 의열단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다. 단재는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 내려 오리니/한 주먹 덥석 그 피를 쥐어/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라며 단결과 투쟁과 승리를 강조했다.

구한말 대전 대덕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단재는 청주시 미원면 귀래리에서 성장했다. 성균관 박사를 거쳐 26세인 1905년 황성신문 논설진으로, 1906년 대한매일신문 논설진으로 참가했다. 일제의 침략행위와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전력질주 할 것을 계몽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재는 이어 19007년 안창호 선생 등이 주도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으며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 논설을 통해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생은 한일합방이 강제 체결된 이듬해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하고 1919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반임정 노선을 취했으며 북경으로 이주, 무장투쟁노선을 강조하며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1924년에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는 등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했으며, '조선혁명선언'은 선생이 1923년의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전략을 이론화하여 천명한 선언서로 유명하다. 단재는 일제에 의해 뤼순형무소에 갇혀 옥살이를 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했다. 이 때 서울에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사에서 돈을 추렴해 장례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귀래리는 국권 상실이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언론인이자 역사가이며 문학인으로서 한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만을 위해 천재적인 재능을 쏟아낸 선생의 위대한 삶과 그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인 도종환은 "살아서 언제나 불꽃처럼 뜨거웠고, 죽어서 더욱 꼿꼿했던 당신"이라며 단재의 삶과 넋을 노래했다. 이곳의 마을과 들녘과 계곡은 깊고 느리지만 단재의 기상을 웅변하듯 푸르고 진하다. 숲속의 햇살이 음표를 떨치듯 빠른 날개짓을 하며 달아났다. 빈 자리엔 밤꽃향기 그윽하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