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

뒤란 왕보리수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소담하다. 선홍으로 저를 맑히며 숙성되어 가는 과정이 힘에 겨워서일까 휘휘 늘어져 있다. 담벼락에 걸쳐 있던 두어 가지는 이미 담장을 넘어갔다.

울 밖의 것은 아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리려 해도 아무도 탐하는 이가 없다. 먹을거리가 풍족해서인지, 사유 재산의 경계가 명확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골목길에 아이들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 싶다. 무심히 오가는 행인에게 제 혼자 눈 맞춤하려 애쓰는 보리수 열매가 외려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웃집 여인에게 전화를 하여 소쿠리 하나 들고 와서 따 가라고 했더니 지퍼 백 비닐봉투 하나를 달랑달랑 들고 온다. 순간 속으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사실 담을 그릇은 어떤 것이든 전혀 이상할 건 없다. 대소쿠리는 못 되어도 최소한 플라스틱 소쿠리는 들고 올 것이라 믿었던, 떫어서 별 맛은 없어도 그냥 어린 시절 추억을 떠 올리고 신바람을 내며 따리라 생각한 건 순전히 내 편견인지 모른다. 보리수 열매야 맛 보다는 앙증맞은 그 빨간 열매를 보는 맛, 따는 재미 아니던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넘겨다보니 열매 따는 손이 영 신통치 않다. 그녀는 이런 열매를 직접 따본 일이 한 번도 없단다. 서울서 자랐기 때문에 시골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추억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 진천이 고향인 자기 남편이 이런 일을 더 좋아한다며,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건성건성 얼마간의 열매를 따 가지고 돌아간다.

도회 생활을 해 왔다고는 하지만 중년 여인의 정서가 이러한데 요즈음 자라나는 이이들이야 오죽하랴. 아무리 보리수 열매가 윤기를 내며 빨갛게 익어가도 어릴 적 추억이 없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옆집 담장을 넘어간 감나무에 달린 홍시가 뉘집 감이냐, 창호지 문으로 주먹을 들이밀며 야물게 소유를 따져 들던 오성과 권율의 감나무 일화가 물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왁자글한 아이들 목소리로 생기가 가득 찼던 골목길은 네 것 내 것 따지면서도 슬쩍 눈감아줄 줄 아는 무던함이 녹아있었다.

얼마 전 사라져가는 골목문화를 찾아 글벗들과 수암골로 향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우암산 자락으로 찾아들면서 마을을 이룬 곳이다. 가풀막진 산자락 따라 호비작호비작 터를 고르고 고단함을 뉘일 안식처를 마련해 가는 동안 오밀조밀 서로 등 기대며 정을 붙여 살아왔음이 읽혀진다.

산업화와 더불어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발전 속에서도 그들의 발걸음은 더뎠다. 운신의 폭이 좁은 비탈에 서서 겨우 자기 균형을 잡아가기에도 급급했을 상황에 버젓한 재개발 동참이 그리 쉬웠겠는가. 민들레나 개망초처럼 그저 그들이 삶아온 삶이 그랬듯 낮게 엎드려 어기적어기적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살아냈으리라.

2007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좁은 골목길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슬리퍼를 신고 전봇대를 오르는 여자아이'가 단연 수암골의 주역이다. 말뚝 박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은 목소리가 사라진 채, 벽화 속의 정물이 되어 어른들의 추억을 회상시키고 있다.

낙서로 얼룩진 변소 문에 '노크' 커다랗게 쓰여 있는 낯익은 글씨가 정겹

다. 어느 골목은 전체가 피아노 건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옛날 수암골 아이들에게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보는 것이 선망이었을 게다.

허름한 담장 너머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들이 게딱지같은 지붕을 서로 맞대고 있는 건 그들끼리 온기를 나누기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없는 살림에도 먹을 걸 넘겨 주고받으며 그렇게 허허로운 삶을 채워갔기에 골목길에선 오래도록 정겨움이 묻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망대에 오르면 불빛 찬란한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자신을 곱씹었을 것인가.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수암골 역시 곳곳이 허물리고 현대식 건물이 번듯번듯 들어서고 있다. 여러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을 받으면서 약삭빠른 도회의 상술이 먼저 손을 뻗치고 있음이다.

수십 년 이곳을 오르내리며, 주민들이라고 왜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토박이들은 여전히 아무 일 없었던 듯 자투리땅에 푸성귀를 심고, 골목골목 틈새에 키 작은 꽃을 가꾸면서 골목길 닮은 모습으로 정을 다독이며 살아간다.

김윤희 수필가

그네들도 한때는 새까만 연탄에 불꽃을 일구며 일탈을 꿈꾸었으리. 그 흔적이 하얀 연탄재로 소복이 쌓여 있다. 연탄재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재탄생 되어 또 다른 볼거리를 만들고 있지만, 수암골 사람들의 고달팠던 삶의 한 단면이다.

"날 위해 웃어 줄래? 넌 웃는 게 예뻐"

입 한쪽이 허물어지면서도 웃는 연탄재의 표정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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