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충북 증평군 증평읍 남하2리 둔덕마을에서 2013 증평들노래축제 하나로 장뜰두레놀이를 시연하고 있다. 2013.06.16. / 뉴시스

증평 '들노래 축제' 행사장인 민속체험 박물관에 도착하니 경내에는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 했다. 무대 위에서 난계국악단의 특별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악기들의 어울림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둔덕길 일대에는 민속 박물관을 비롯하여 대감 집과 초가집, 두레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골의 향기가 배여 있는 고택을 보니 정겨웠다. 길 놀이패와 풍물놀이패가 풍악을 울리고, 각설이 품바타령에 축제 분위기는 고조됐다. 한옥 체험관에서 시조경창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선시대의 옷매무새를 그대로 재현했다. 깊고도 긴 호흡으로 애끓는 목소리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랫가락이 장내를 구석구석 휘감아 돈다. 시조에 나지막이 깔리는 대금소리는 바람소리 쇳소리 새소리로 시리고 맺힌 음색으로 고독과 쓸쓸함을 더 했다.

오후 5시가 되자 감자 캐기 체험이 있었다. 오천 원만 내면 감자를 캐 갈수 있다는 말에 선뜻 접수를 했다. 참가자 중에는 감자를 한 가마니라도 캐낼 요량으로 몸빼 바지에 장화, 장갑, 그늘막 선캡으로 완전무장을 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당 열 포기의 감자만 캘 수 있도록 깃대를 꽂아 놓았다. 폭신폭신한 흙 두덕에 호미질을 하자 햇감자가 투명한 껍질 사이로 뽀얗게 그 자태를 빛냈다. 수확의 기쁨 나눈 사람들 얼굴마다 자연을 닮은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이틀 뒤 이곳을 혼자 다시 찾았다. 고풍스러운 박물관 돌계단에서 들녘을 바라본다. 인적이 끊어진 풍경은 적멸(寂滅) 순간처럼 다가왔다. 보릿밭 사잇길을 뻐꾸기 울음소리에 발맞추어 폴싹폴싹 흙먼지 날리며 타박타박 걷는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남게 된 상우는 강진의 보리밭을 찾아간다. 융단처럼 낮게 깔린 보리밭은 바람에 흔들려 넘실대는데, 그는 그 한가운데 서서 명상하듯 눈을 감은 채 헤드폰을 쓰고 소리를 담으며 미소 짓는다. 상우의 순정과 은수의 라면 사랑 같은 이기적인 사랑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함부로 애뜻하게 다가 왔던 기억이 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미소 짓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상우의 명대사는 역설적으로 떠나 있어도 은수를 향한 사랑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다짐의 미소가 아닐까,

김민정 수필가

16년이 지난 지금, 그 해 봄날이 날 이곳으로 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보리밭 사이로 파릇파릇 냉이가 올라올 무렵의 청 보리밭 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아쉬움이 있었으나, 누렇게 익은 황금보리 밭에서 서걱거리는 사랑의 결실이 가슴을 파고든다. 원두막 위에 앉았다. 화려했던 무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열기만이 다랑논과 뙤기밭을 떠돈다. 조용하고 한적해서 나만의 세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오후다. 상형문자 같은 논에는 볏 잎이 일제히 꼿꼿한 모습으로 줄기에 심지를 돋우고 햇볕을 견디며 푸르런 빛으로 수놓았다. 연잎으로 가득 찬 논둑에 섰다. 조용한 물속에서 온몸을 담그고 있는 막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손으로 당겼다. 세상 욕망에 물들지 않고 바람과 충격에도 부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워낸 모습이 고고하다. 오수바닥의 허물을 덮고 청정함을 내보이듯 내게 주어진 빛을 들고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은 날이다. 아릿한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마음을 한껏 기대었던 둔덕리 하루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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