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인섭 정치행정부장 겸 부국장

호송차서 내려 법정 향하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뉴시스

'4색 당파'로 대표되는 정쟁이 심했던 조선후기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이 사약을 받았다. 조선후기 당쟁의 한축을 형성했던 노론(분당 이전 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숙종(1661~1720)의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그는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추종자들에게는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는 '송자(宋子)'로 불렸다. 그러나 숙종이 한때 아꼈던 장희빈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제주로 유배됐다. 분노를 삭히지 못한 숙종은 '가중 처벌'을 결심,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는 83세의 고령이었으나, 두사발의 사약을 마실 때까지 끄떡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입안에 상처를 낸 뒤에야 죽음을 맞았다는 속설도 있다. 야사에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공복에 마시는 요료법(尿療法)을 건강비법으로 지녀 가능했다는 속설도 있다. 조선후기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주도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답게 죽음을 둘러싼 스토리텔링조차 여럿 전해진다.

송시열의 죽음에 단초를 제공한 장희빈 역시 사약을 받아 최후를 맞았다. 노론과 대척점에 섰던 남인의 후원을 받았던 장희빈은 노론 세력의 중심 인물 중 한명이었던 인현왕후(숙종의 2번째 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 들켜 '부자탕'을 받았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의 최후를 처참하게 기록했다.

"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 하시니 여러 궁녀들이 숟가락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 마음이 아니 계시고, 빨리 먹이라 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라는 기록이 나온다. 장희빈이 최후를 맞는 장면은 역사드라마에 써먹기 딱 좋아 종종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정사인 숙종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장희빈이 자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두 사례 처럼 왕조가 행사한 최고 형벌권은 사약(賜藥)이었다.

한인섭 정치행정부장 겸 부국장

엊그제(28일)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 출석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스스로 '망한 왕조의 도승지'를 자처했다. "망한 왕조에서 도승지를 했다면 사약을 받지 않겠느냐.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재판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면 깨끗이 마시고 끝내고 싶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발언 취지를 확인하는 특검을 향해 "전혀 잘못한 게 없지만, 단지 비서실장으로 재직한 게 죄"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국민적 공분을 샀던 블랙리스트 역시 '모르는 일'이라며 딱 잡아뗐다. 혐의를 인정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이 자신에 어떤 영향을 줄지 너무 잘아는 법률가다운 전략인 셈이다. 왕조에서 벌어졌던 정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법꾸라지'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실감한 발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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