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충북 100경 - 의암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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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7.07.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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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저항, 일탈…최고의 선을 향한 용기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에 위치한 손병희 선생 사당과 생가 / 홍대기 작가

정의란 무엇이고, 용기는 언제 발동하며, 최고의 선(善)은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가. 이 모든 것은 탁월한 높이에서의 독립적인 사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누군가에 얽매이거나 종속적인 삶이거나 권태적인 일상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정의나 용기가 생길 수 없다. 최고의 선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과 함께 도전과 저항과 일탈이 필요하다. 세상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시선과 자기파괴 말이다.

장자는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보고, 소리 없는 곳에서 조화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고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진정한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이며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고 했다. 시대를 이끈 모든 성인과 학자와 혁명가와 예술가는 불안과 긴장의 순간을 도전과 변화와 창조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이를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사람 사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웅변하지 않았던가.

동학(東學)의 시대는 암울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고 정의가 사라졌으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포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공자의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절망적이었다. 반듯한 생각과 행동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사람 사는 세상을 일구겠다며 태동한 것이 동학이다. 1860년 최제우가 한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백성을 지키며 다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세웠다.

동학은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농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 조선 전 시대에 걸쳐 계속되어 온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농민 분노가 폭발했다. 그 단적인 예로 1811년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이다. 그 후 1862년 진주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동학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에 위치한 손병희 선생 사당과 생가 / 사진 홍대기 작가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2년 청주 금암에서 출생, 1882년(고종19) 20세 때 동학에 입교했다.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이끌고 정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며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원산, 강계 등지로 피신했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해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개혁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에 취임했으며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 중 사망했다.

내수읍 금암리에는 1만여 평의 넓은 터에 생가와 동상과 전시관 등이 잘 가꾸어져 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파고다 공원의 팔각정을 재현한 정자도 있다. 바로 옆에는 소나무 숲이 있다. 선생은 이곳에서 세상을 응시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한 큰 뜻을 품었을 것이다. 소나무처럼 강건하되 맑고 향기로운 한국인의 정신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하여 의암의 높고 깊으며, 넓고 강한 독립적인 시선을 본받고 싶다.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아름다운 도전을 하고 싶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담지못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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