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강전섭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요 며칠 그녀의 드나듦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새벽을 흔드는 요란한 날갯짓으로 저공비행하며 살포시 호숫가에 앉는다. 순간 고요한 호수석에 잔물결이 일렁인다. 지난밤 열대야로 갈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잠시 목을 축이는가 싶더니 이내 수면을 차고 오르며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를 쫓는 내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허전한 마음에 정원을 하릴없이 서성인다. 담쟁이 숲이 몹시 시끄럽다. 만개한 담쟁이꽃이 꿀벌을 위해 마련한 잔칫상 때문이다. 축제가 어찌나 소란스럽던지 귀가 먹먹하다. 그 틈바구니에 유독 몸놀림이 남다른 여인이 보인다. 진초록 잎사귀 속을 분주히 오가며 무언가로 성을 쌓는 모습이 심상찮다. 큰 개미처럼 생긴 호리병벌이다.

호리병벌은 명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을 연상하게 한다. 이 벌을 보고 있으면, 개미허리처럼 날렵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지닌 그녀가 떠오른다. 별과 같이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처럼 겹눈에 황갈색의 짙은 줄무늬가 아주 인상적이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몸통은 검은색으로 윤기가 자르르하다. 가슴 위쪽 부분에는 가는 털이 촘촘하고, 날개는 갈색으로 광택을 발한다.

벌집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옆모습은 마치 왕관처럼 보인다. 물을 긷는 투박한 질그릇인 장군 같기도 하고, 조롱박을 닮은 듯도 하다. 주막거리에서 탁주를 붓던 백자 주병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런 자신만의 궁전을 짓는 탁월한 솜씨에 그저 신비롭고 놀라울 따름이다.

벌들에게 집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장소이자 주거공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겐 종종 그 이상이다.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고,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때론 과도한 욕심으로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은 부실공사로 많은 부작용을 낳지만, 벌들은 정도를 걷는다. 어찌나 견고하게 짓는지 불량주택이 없다. 철저히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녀는 육아 능력도 뛰어나다. 토방에 알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를 위해 나방이나 자벌레의 애벌레를 집어넣고 먹이를 마련한다. 먹이의 신선함을 위해 마취시키는 정교한 침술은 경이롭기만 하다. 천하 명의 편작과 화타도 한수 배워야 할 의술이리라. 활어의 신선도를 유지하고자 생선을 마취시키는 침술도 호리병벌에게 배운 한 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본 그녀는 집짓기의 달인이다. 진흙집을 짓는 솜씨가 기막히다. 진흙에 타액을 분비하여 경단처럼 만든 후 물어 날라 그늘진 잎사귀 아래에 집을 짓는다. 두서너 시간이면 멋진 토성이 완성된다. 알을 보호하고자 온습도 조절은 물론 다른 곤충들의 침입도 고려해 여러 개의 방을 만드는 것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웬만한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완벽한 토방이다. 가히 20세기 천재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도 감탄할 만하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돌아본다. 신라인들이 만든 동양 최고의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나 에스키모인의 얼음집인 이글루, 몽고 유목민의 전통 가옥 게르도 호리병벌의 집짓기를 모방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척간두에 선 촉한을 위해 출사표를 던지고, 오장원에서 위나라 사마의를 유인하는 호로곡 전투를 구상한 제갈량의 전략도 호리병벌 집을 본뜬 것으로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호로병(葫蘆甁)은 호리병의 원래 말이다. 호리병박은 여러 가지로 쓰임새가 많아 사람들이 애용하는 박이다. 이런 호리병박을 닮은 집을 짓는 호리병벌은 위대한 예술가이다. 호리병벌의 흙집짓기 또한 우리네의 집짓기와 다름없는 예술 행위이다. 도공이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질그릇을 빚듯 벌들의 생존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엄숙하면서도 성스럽다.

곤충들은 어떤 경우라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비록 미물이지만 자연의 순리를 따를 줄 안다. 최대한 자연환경 위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나친 욕심을 내지 않는다. 자연생태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무모한 욕망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작은 숲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곤충의 세계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우리 인간이 갖는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무지의 산물인지를 새삼 느낀다.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담쟁이덩굴 앞에서 서성인다. 순간, 축제의 숲에서 빠져 나온 우아한 그녀. 마치 오드리 헵번이 로마에서 자유를 만끽하듯 훨훨 날아오른다.


약력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청주문화원 이사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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