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이성기 고용노동부 차관이 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하반기부터 공공부문에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고 밝히고 있다. 2017.07.05. / 뉴시스

강렬한 조명아래 누군가 복면을 쓰고 나타나 목에 힘줄이 드러날 만큼 혼신을 다해 노래부르는 프로그램이 있다. 신분, 나이, 직종을 숨긴채 오로지 가창력으로 승부를 내는 모 방송의 '복면가왕'이다. 가면을 벗으면 방청객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깜짝 놀란다. 주로 비주얼로만 갖춘줄 알았던 아이돌 스타뿐 아니라 작곡가나 배우, 개그맨, 심지어 운동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면을 벗는 순간 방청객은 환호하고 주인공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이 프로그램의 묘미는 반전에 있다. 무대에 오른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가창력에 집중할 수 있다. 선입견과 편견이 배제된 일종의 블라인드 시험이다. 만약 처음부터 얼굴을 드러냈으면 판정단과 방청객의 평가는 뻔했을지 모른다.

"대기오염으로 한해 6만 명이 사망합니다", "오늘 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 환경오염을 경고한 공익광고의 카피 한줄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광고쟁이'가 있다. 지방대 시각디자인 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학생 광고 공모에 한번도 입상하지 못했고 졸업 후에는 광고대행사 수십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모두 외면당했다. 먹고살기위해 간판 그리는 일을 하면서 직장을 찾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건너갔고, 1년 만에 원쇼 페스티벌과 클리오 어워드 등 40여차례 세계 유수의 광고상을 휩쓸었다. 내노라하는 광고회사들이 손을 내밀엇지만 모두 거절하고 공익광고업계의 스타가 됐다. '광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제석광고연구소 이제석 대표 얘기다.

선진국도 명문대는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서열화되고 학벌을 중시하는 나라는 흔치않다. 이제석씨를 소개했던 모TV는 "루저에서 광고 천재로"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지방대출신=루저'라는 그릇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지잡대'(지방의 대학을 낮춰 부르는 인터넷 속어)라는 말이 버젓이 쓰인다. 무엇보다 최악의 청년실업난 속에 지방대생들의 대기업 진입문은 더욱 좁아졌다. 의욕을 상실한 지방대생들은 졸업후 전문대에 재입학하거나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대기업 입사자 대부분은 서울소재 학생들이고, 지방대생은 '지역할당제'에 따라 끼워넣는 경우가 많다. 실력을 떠나 대학간판으로 불이익을 받는사회는 병든 사회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하지만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을 강조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공공기관 입사지원서와 면접에서 출신지역, 가족관계, 신체적조건, 학력게재를 금지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전면 시행된다. 민간기업도 긍정적이다. 취업포탈 잡코리아가 기업체 인사 담당자 418명에게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 물은 결과 5명 중 4명이 찬성했다. 또 절반이상은 '스펙보다 인성·직무능력 중심으로 채용의 틀이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관건은 실력이다. 학벌천국 대한민국에서 지방대 출신 두남자의 생존지침이 담긴 "날개가 없다, 그래서 뛰는거다"의 공동저자는 광고공모전에 수십회 수상하며 둘다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고 CEO로 거듭났다. 블라인드 채용은 지방대출신에겐 기회지만 실력을 쌓지 않는다면 외려 명문대생들의 들러리만 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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