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승화한 열정… 천재의 먹향에 물들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에 위치한 운보의 집/ 홍대기(사진작가)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8살 때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고, 20대에는 '피아노 3중주곡', '비창' 등을 작곡하면서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30세에는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청력은 점점 약해지면서 47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영웅', '운명', '전원', '장엄미사곡', '합창교향곡' 등 불멸의 음악세계를 일구었다.

운보 김기창. 일곱 살 때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은 운보는 귀먹고 말 못하는 장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동양화단의 거목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목수로 키우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가르쳤다. 18세 때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침묵의 심연 속에서 무려 1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에 위치한 운보의 집/ 홍대기(사진작가)

세필(細筆)에서 시작해 한국 산하의 정기를 수묵(水墨)의 농담(濃淡)과 단순한 색상으로 힘차게 그려낸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대담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를 거쳐 말년의 '걸레그림'에 이르기까지 실로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바보란 덜된 것이며 예술은 끝이 없으니 완성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바보산수를 그린다"고 했던가.

자유와 순수, 그것은 더 없는 운보의 자산이자 해학과 천진성으로 드러나는 묵필의 분수령이 되었고, 무위와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대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미감과 형상성의 바탕이 되었다. 운보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처한 장애와 환경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고, 둘째는 그칠 줄 모르는 정열과 창조적인 에너지로 인한 다양한 경향의 창출이며, 셋째는 바보산수에서 샘솟는 한국 미술의 정통성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그 현대적인 재해석이다.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과 대범성, 해학적 성정도 중요한 대목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

운보만큼 표현이 큰 예술가도 흔치 않다. 세밀묘사, 파격적인 묵법 등 참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다. 전통적 소재인 인물과 화조에서 청록산수, 민화풍의 바보산수, 현대적 풍속도, 그리고 추상적 이미지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폭이 넓고 끝이 없었다. 봉걸레에 먹을 듬뿍 찍어 병풍 위를 오가며 붓이 가는대로 자신의 전체를 품는 행위는 섬세한 붓끝으로 세밀화를 그리던, 힘찬 필치로 세상 모든 형태를 구사하던 작가가 마지막 어느 경지에 도달한 달인으로서의 단면을 보여준다.

운보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요 영화며 소설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지혜와 따스함으로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일제 당시 군입대를 찬양한 친일그림은 반민족적 행위라는 비판도 받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우향 박래현이 운보의 여인이자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다. 그녀는 예쁘고 조근조근 다정했고 붓끝이 바다처럼 깊었다. 조형성과 추상성을 넘다드는 화풍은 수묵화의 운보와 대조를 이루면서 나라 안팎에서 부부전을 열기도 했다.

운보 자화상

그렇지만 그녀가 일찍 죽자 운보는 슬픔에 젖어 여러 날, 어려 해 방황했다. 고심참담(故心慘憺) 끝에 어머니 고향인 청주 형동으로 내려와 자신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우람한 한옥과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공원과 미술관을 함께 지었다. 2001년 1월 21일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붓만 대면 무엇이든 그림이 된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화필로 세상과 뜨겁게 사랑했던 곳이다. 운보의 집을 한 바퀴 돌면 먹향이 가슴까지 물들겠다. 붓끝에서 강물이 흐르는 신비를 맛보겠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담지 못한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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