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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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로 받은 'Q&A a day'는 일기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표지에 적힌 글을 인용하여 옮겨본다. 하루에 질문 하나를 5년 동안 답을 적는다. 첫 장부터 쓰지 않아도 되며 시작한 달과 날짜에 있는 질문에 답하면 된다. 해가 바뀌어도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고 5년을 답하면 1천825개가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일기인가? 싶기도 하고 반복되는 질문이 지루할 것 같지만 지난해와 생각의 차이를 알아보는 일은 흥미롭다. 변화되는 것에는 똑같다고 느낄 뿐 서로 다름이 있다.

유럽에서는 초판 발행 이후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판매되자 관심 두고 있던 딸이 먼저 시작하고 사 주었는데 무척 부담되는 선물이었다.

지금까지 일기를 수없이 써왔지만 끈기 있게 쓴 적 없다. 의욕에 넘쳐 시작하면 단거리 계주처럼 빨리 끝났다. 감성에 치우쳐 다른 장르에 도전하다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고 지쳤다. 파리 니스 해변가 근처 문구점에서 독특한 디자인 노트를 샀다. 추억이 있으면 꾸준히 쓸 거라고 생각했다. 첫 장도 못썼다. 한지로 묶어 만든 일기장은 종이 냄새가 좋아서, 귀품 있는 보라색 표지 일기장도 오래 쓰지 못했다. 하루 이틀 쓰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의무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기장은 그해 내가 있다. 채우지 않은 빈 곳은 추억과 상처와 고민과 행복한 시간이 함께 공존한다. 쓰지 못하는 내 안의 고백, 쓸 수 없어 망설인 시간부터 일기는 멈췄다. 천'Q&A a day' 는 무엇을 쓸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글쓰기 분량도 없다. 주변에서 겪은 관계의 솔직함이나 자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쓰고 싶지 않으면 여백으로 두어도 괜찮다. 기존 일기는 시작과 끝이 없는 수평이라면, 지금 쓰는 것은 원이다. 원(圓)은 역동성 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오늘은 어떤 질문을 받을까 설레기도 한다. 가끔은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질문에 감동 받고, 감성을 깨우는 질문을 접하면 무디어져 가는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가볍게 생각하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오래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질문에 답을 선뜻 쓰지 못했다. 한참 앉아 있었다.

이재에 밝지 못하여 집을 부동산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평수가 넓거나 새집을 욕심부리지 않았다. 집은 삶의 냄새가 나고 온기가 있으면 되었다. 방과 후 강사라서 오후에 학교에 가는 나는 오전은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다. 커피 마시고 음악 듣는 취미 공간이며 책 보고 수업 준비하는 쉼터다. 전망도 좋아서 커피 잔을 놓으면 커피숍이고 우암산에서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스카이 라운지다. 집은 내 삶의 뮤즈였다.

취준생 아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생활리듬이 바뀌었다. 밤과 낮이 바뀐 그애로 오전 시간은 사라졌다. 숙면에 방해될까 봐 소리가 나는 행동은 가급적 피했다. 출근을 서두르면서도 밥해야 하고 반찬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자식이라도 성인 아들은 어렵다. 더군다나 대학 입학 이후 떨어져 살던 기간이 길어서 낯설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즈음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를 읽고 감동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읽고 나면 금세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독후노트는 긴요하게 쓰인다.

첫 장에서 읽은 '쿼렌시아'는 달콤한 충격이었다. 스페인 어로 안식처를 일컫는데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가 잠시 쉬는 장소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곳은 소가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는 곳이다. 책을 읽는데 퀘렌시아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운명을 견뎌야 해야 하는 외마디 소리는 내면의 나였다.

내 집에서 소의 안식처 같은 퀘렌시아를 꿈꾼다. 하루의 삶도 경기장이다.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경쟁해야 하고, 다수 의견에 흡입되지 못하는 내 소리의 나약함을 견뎌야 한다. 학생들과 만남은 나날이 흔들린다.

2학년 남자아이 k는 첫 시간부터 산만했다. 의욕도 넘친다. 모든 활동은 그 애가 먼저 해야 하는 욕심과 장난이 지나치다 싶어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겪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순간 k가 투우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퀘렌시아가 그리웠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 아무도 없는 곳, 감정 표출이 자유로운 곳, 그러나 문은 닫혀 있지 않아야 하고 쉬는 시간은 짧아야 한다. 퀘렌시아는 쉴 때 공간이 빛나고 집은 머물면서 안락함을 안다.

조영의 수필가

일기를 다시 펼쳤다. 생각이 정리되었다. 올해 쓴 내 생각이 내년, 그다음 해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다려진다. 5년의 일기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기분 좋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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