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공수레공수거이며, 털어봐야 빈 손바닥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힘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삶의 한복판에선 그런 깨달음은 외면당한다. 그게 인지상정이기도 하지만, 그맘 땐 대개 망각하고 살기 마련이다. 너무 바쁘니까,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하고픈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문제는, 누구도 예외가 되지 못할 그 각성을, 뒷감당이 힘든 너무 늦은 시간에 하게된다는 점이다. 당장 슈미트씨만 해도 그렇다. 거창한 은퇴축하연을 차려줄 만큼 충성을 바친 회사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년. 이제 딸 시집보내고 아내와 여유있게 여행이나 다니는 풍요로운 뒷풀이가 준비됐다고? 천만에, 불행은 마치 작당한 듯 한꺼번에 몰려온다.
 우선 아내의 복수가 기막히다. 끈 떨어진 남편에게 평생 살 맞대고 산 여편네 흉보는 재미 좀 주는게 무에 그리 억울하다고, 누가 쫓는 것처럼 서둘러 떠나버렸다. 게다가 더 황망한 건 딸의 배신이다. 천지분간 못하는 걸 키워줬더니 저 혼자 나고 자란 듯 애비의 손길을 외면한다. 그래도 싸구려 관 때문에 애비의 매정함을 비난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구제불능 날건달에게 생짜같은 인생을 맡기겠다는 건 도무지 용납 못할 일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어바웃 슈미트''는 66세 퇴직자인 슈미트씨를 통해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서 삶을 조망한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수고 많으셨느냐며, 이젠 여유있게 인생을 즐기시라는 젊은이들의 인사치레도 결국 야멸찬 퇴장선고일 뿐이다. 열심히 가족 부양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위했건만, 그동안 당신 때문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모른다는 공격도 받아야한다. 그러니 삶은 비극 아니던가.
 하지만 ''어바웃 슈미트''는 슈미트씨의 비극적 삶을 함께 통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그러기는 커녕 영화는 영리한 코미디로 노선을 정한다. 마구 어질러진 집과 쓰레기장으로 직행한 서류박스들로 상징되는 슈미트씨의 삶을 보며 관객들이 축 늘어진 아버지어깨를 떠올릴 즈음 영화는 엇박자로 웃음을 유발해내는 것.
 과도한 감상이나 지나친 경박 모두를 피하며 전진하는 영화의 엇박자는 가히 절묘하다. 아내에 대한 험담을 신나게 늘어놓은 편지를 엔두구에게 부치고 돌아오면 싸늘한 시체가 된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또 그런 아내의 빈 자리에 못 견뎌하며 그리움에 빠져들려하면 의외의 반전이 기습한다.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회개했더니, 숨겨놓았던 아내의 연애편지가 그를 조롱하는 격이라니.
 이처럼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오가는 영화의 경쾌한 스텝은 결정적으로 잭 니콜슨에게 빚지고 있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늑대인간이 될 수 있는 배우 잭 니콜슨은 곤경을 거듭하며 한없이 추락해간다. 어쩔 도리없이 딸의 결혼을 ''과도하게'' 축하해주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슈미트씨의 지리멸렬은, 잭 니콜슨이 가진 막강한 카리스마와 충돌하면서 웃음을 발생시키고 거기에 묘한 결을 만든다.
 ''어바웃 슈미트''의 엇박자는 멜로 드라마로 마감된다. 별 생각없이 후원을 결심했고, 어찌 하다보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가 된 엔두구로부터 온 그림 한 장. 사랑했던 이들로부터 외면당한 자신의 손을 생면부지의 여섯 살배기가 잡고있는 그림은 그를 오열에 복받치게 한다.
 그렇다면 지리멸렬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슈미트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길고 긴 울음 끝에 비로소 정신이 개운해졌다면 그는 우선 집부터 치우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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