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윤오월 긴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다. 능선위로 맑은 하늘은 오늘도 비를 내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밭에는 가뭄으로 고추가 쭈글쭈글 생기를 잃고 한창 개화기 참깨는 자라지 않은 채로 몇 송이 꽃을 피우고 그만이다. 가끔 비 예보가 있긴 하지만 뚜렷한 비소식도 없으니 계속되는 가뭄에 농부들은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간다. 근교에 있는 밭에 단비를 기다리며 빈 땅으로 둔지라 아깝기도 하거니와 생명의 근원인 땅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오늘은 기꺼이 모종을 이식하기로 했다. 십 수 년 전 기억을 더듬어 이랑에 구멍을 뚫고 물을 준 다음 들깨모종을 하나씩 꽂고 다독 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자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파오고 두 다리는 저리고 구슬 땀방울로 뒤범벅된 얼굴은 따끔 거려왔다. 지금껏 직장생활로 늘 정장차림과 하이힐을 고집하며, 업무상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언제나 곤두세운 촉각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한 적도 많았다. 오늘 이렇게 창 넓은 모자에 목장갑을 낀 모습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농부의 딸임에는 틀림없나보다.

며칠 후 궁금하여 밭에 나가보니 심한 가뭄 탓에 모종은 풀이 죽고 대부분 메말라 죽어있었다. 고생하며 심은걸 생각하면 단 한포기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간혹 먹구름이 멀어지는 모습만 바라보며 마음만 따라다녔다.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물을 길어 링겔 주사를 주입하듯 정성을 다했지만 탈수현상은 여전했다. 폭염은 점점 더욱 열기를 훈풍기로 돌리듯 밭고랑으로 내뿜으며 몇 포기 안 남은 고추, 호박, 토마토까지 모조리 말렸다. '장'의 절구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마농의 샘] '장'은 애써 지은 농작물이 마른풀로 변하자 실의 빠진 어느 날, 마른번개와 천둥소리만 요란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절규한다.'난 꼽추란 말이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제가 불쌍하지 않은신가요? 지금 나도 하늘에게 몽니라도 부리고 싶다. 그러다 문득 이 가뭄이 농부만이 겪는 아픔이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오늘날, N포세대, 헬조선세대, 민달팽이세대로 2,30대들의 마음도 다 타들어가고 있다. 자조와 절망의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들 모습이 지금 농부의 모습이다. 그들의 일상은 순수가 메마르고 끊임없는 도전의식에 사로잡혀 쩍쩍 갈라진 땅을 뚫고 나오느라 힘든 삶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 집에도 예술을 쫓아 사는 민달팽이 둘을 키우고 있다. 월급날이면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먹이를 주고 있다. 그나마 목마르고 메마른 삶을 적셔줄 가족이 있으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젊음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혼자만의 아니라는 걸 믿으며 지금 이 시간을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깨워 자신의 정체성을 가꾸어 간다며 푸른 가뭄에 생명의 단비가 쏟아져 내릴 것으로 믿는다.

김민정 수필가

긴 기다림 속에서 드디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낙비가 한바탕 퍼부었다. 소낙비는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밭고랑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토할 줄 모르고 받아 마시고만 있는 들녘은 지금 환희의 송가를 부르고 있다. 이 순간이 곧 축복으로 다가온다. '그래 이 맛으로 살아가는 거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엎드려야 땅을 일구듯이 내 자신을 낮추는 법과 땅위의 겸허함과 땅속의 진실함을 체험하며 자연이 주는 만큼만 얻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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