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지금도 참외를 보면 가슴이 뛴다. 노란 바탕에 하얀 줄무늬 참외는 보기만 해도 단박에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아내는 가끔 참외를 사온다. 크고 잘생긴 참외도 좋지만 배꼽이 볼록 나온 작은 참외도 참 좋다. 장에 가면 붉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참외는 마치 꽃처럼 예쁘다. 옆에만 지나가도 훅- 달콤함에 발길을 멈춘다. 장날 한 봉지 사온 참외는 껍질을 깎지 않는다. 웬만하면 잘 씻어 덥석 깨물어 먹는다. 와작와작 먹는 소리도 맛있고 어린 시절 참외도 생각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가면 비료포대를 오골오골 접어 만든 부채가 인상적이었다. 크기도 컸지만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부채를 찾았다. 바로 농약사에서 나오는 부채다. 그 부채에는 과일이나 채소 같은 사진이 새겨 있었다. 보름달 같은 둥근 수박도 된장에 쿡, 찍어 먹으면 좋을 것 같은 고추도...그중 나만의 부채는 참외 사진의 부채다. 하지만 그 부채를 여름에 사용하지 않고 서랍 속이나 옷장 위에 잘 모셔 두었다. 대신 책받침으로 더위를 물리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사온 참외를 먹고 한밤중 똥이 마려웠다. 붉은 꼬마전구가 켜지는 변소는 정말 무서웠다. 마침 그날 텔레비전 '전설의 고향'을 보아서 더 그랬다. 할 수 없이 뒤란 작은 밭에다 해결을 하고 흙으로 잘 파묻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참외 싹이 나고 진짜 구슬만한 참외가 달렸다. 난 달랑 하나 달린 참외가 신기해 물도 잘 주고 키웠다. 하지만 생각만큼 참외는 크지 않았다. 초가을이 깊어갈 무렵 참외 덩굴은 조금씩 시들어갔다. 할 수 없이 며칠 후 내 주먹만 한 참외를 땄다.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참외는 달진 않았지만 가을에 먹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특히 하얀 눈이 내리는 날에는 유독 참외가 생각났다. 그럴 때면 잘 보관하던 농약사 부채를 꺼내 노란 참외에게 한참 눈맞춤 했다. 살짝 눈을 감으면 정말 참외를 먹는 듯 입안에 달콤함이 맴돌았다. 마치 살구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것처럼. 지금은 겨울에도 참외를 맛볼 수 있지만 여전히 나의 참외 사랑은 똑 같다.

그러다 한번은 새벽에 박동규 선생님의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이란 수필집을 읽다가 꺼이꺼이 소리 죽여 가며 울고 말았다. 방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아내를 깨웠다. 깜짝 놀란 아내는 내 손에 쥐어진 책을 보곤 알았다며 안심하는 눈치다. 난 책을 펴고 '무덥던 한여름 개구리참외 하나'란 글을 또 훌쩍이며 읽었다. 박동규 선생님이 어릴 적 피난 중 아무 것도 못 먹었을 때였다. 배고픔에 가던 중 참외를 보고 갖고 있던 옷가지와 바꾸려고 했지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다시 배고픔에 지칠 대로 지쳐 가던 중 우여곡절 끝에 한 할머니가 개구리참외를 그냥 주셨다. 참외를 먹으려는 순간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아내도 슬퍼선지 아님 괴로워선지(?) 함께 울어주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다음 참외를 먹을 때 박동규 선생님의 참외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눈물엔 잠을 자고 싶은 괴로움이 더 많이 섞여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참외는 세월이 흘러도 늘 애틋함으로 다가온다. 올해는 참외를 정말 많이 먹어야지, 생각하는데...왜 가슴이 또 뛰는지 모르겠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