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회색빛 하늘이지만 아침 햇살이 비치니 반갑다. 수마를 몰아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려 나온 새침데기 여름 해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하고 싶다. 그 순간에 비가 멈추어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감사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한다.

거대한 축제에는 태극기 게양이 당연하지 않은가. 제헌절이니 이상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천둥 번개와 전봇대 우는소리가 무서웠지만 계절의 자연 현상이려니 하고 이내 무심해졌다. 인터넷 시대가 되다 보니 이제는 재난대비 문자와 화면의 허우적대는 물속 차량 아래 "무심천 범람 위기"라는 자막이 더 공포로 다가온다.

까마득히 잊고 지낸 창고 속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 물을 막아 둑을 쌓아서 만들었다는, 가장 오래된 3대 저수지 중 하나인 의림지 둑이 터졌다. 수문이 작동되지 않자 어느 농부가 둑 쪽으로 물길을 만들었는데, 폭우가 쏟아지자 의림지 물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범람하여 자식 같던 농경지를 한꺼번에 휩쓸었다.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돼지 등 가축이 떠내려가는가 하면 인명피해와 수재민이 발생하였다.

아마 고2 이맘쯤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좋아 평소에 물 같은 사람으로 통하던 아버지 친구는 수해로 한해 농사를 망치자 친구를 보증 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평생 농사만 지어 사업에 문외한인 사람이 동분서주했지만 1년 후 잠적을 해버렸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양쪽 집안의 가족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남겨준 것이다. 악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고 하지만 한 분이라도 모질었다면 그런 피해를 주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몸져누우시고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 여파로 내 꿈도 좌절이 되고 발길이 자연스레 의림지로 향했다.

물이 다 빠져나가 바닥까지 보이던 저수지에 그새 시퍼런 물결이 일렁였다. 둑에 앉아서 내일 아침 신문에 '아까운 꽃잎이 떨어지다.'라고 써줄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행인이 집적 거렸다. 겁이 나고 물도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는데 몇 년 후 의림지에서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한 것을 보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만큼 물은 내개 있어 아픔이고 또한 귀한 것이다.

그 물이 내게만 그러하겠는가. 겨우내 메마른 가지를 어루만져 새 순을 돋게 하고 꼭 다문 꽃봉오리가 활짝 웃음을 짓게 한다. 가뭄에 타들어가던 대지를 푸른빛으로 재생 시키는 것도 물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은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 마시는 생수 한잔은 건강을 지켜 준다. 혼절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갱도에 묻힌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은 생사를 바꾸어 놓는다. 버들잎을 띄워 여염집 규수가 내민 우물물은 쳔생연분을 맺어주었다고도 하고.

그뿐인가.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던 좌판의 야채나 생선에 물을 뿌리면 금방 싱싱해진다. 물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 한번 크게 고마워 한 적이 있는가.

순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섭다고 이제 물은 인간들에게 화가 난 것이다. 논고랑이 쩍쩍 갈라지고 모내기도 못해 학수고대하던 비를 내려줬건만, 이기적인 우리들은 금세 권태로워하며 물만 흐르는 게 아니고 마음도 흐른다고 변명을 해버렸으니.

불만 잿더미로 만드는 게 아니고 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할퀴고 부수고 쓰러트린다. 그 부드러움이 표변하여 바위를 뚫고 산을 무너뜨리며 집채만 한 다리를 끊어 놓았다. 우리들은 그에게 수마(水魔)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한 나라 안에서도 어느 지역은 수해로, 또 다른 지역은 가뭄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과학문명 시대에, 균등하게 대기의 수증기를 조정해서 적당하게 비가 내리도록 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이 너무 앞서간다고 할지.

생명 있는 것들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으니 그는 불사신에 버금간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난개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면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하고 담기는 그릇 모양대로 바뀌니 유연하며 가장 부드러우면서 가장 강한 것을 부린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의미를 음미해보며 이제라도 치산치수에 다 같이 힘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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