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9. 차의 여정 (우전편)

쪽빛 하늘이 맑고 푸르다. 여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른 것은 이상 기변에서 오는 것일까. 파란 바람이 더운 공기를 타며 잎사귀의 물방울을 털어낸다. 지루했던 장마는 곳곳에 흉터만 남긴 채 여정을 다하고 사라졌다.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 또다시 폭염의 긴급재난이 핸드폰을 울릴 것이다. 불과 물의 조화.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장맛비로 손바닥만 한 마당의 갖가지 꽃과 풀들이 멋없이 올라왔다. 더 짙고 더 붉어진 능소화는 소리 내어 담장 위를 군림하고, 멋없이 올라온 남촌의 위초리는 학의 다리같이 휘청거린다. 탐스럽게 올라온 야생 다육이, 천년초, 붓꽃, 땅나리, 국화, 영산홍, 앵두나무, 매실나무의 잎들이 확연하게 진해졌다. 더 이상의 짙은 초록은 볼 수 없지 싶다. 자연에 순응하며 은밀하게 적응하는 잎들의 초연함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화분에 심어놓은 찻잎의 가장자리가 톱니같이 날카롭게 돋아나있다. 살짝 만져보았다. 도톰해진 잎사귀가 중학생의 까까머리같이 뻣뻣해졌다. 불과 몇 달 전. 추위를 시샘하며 온 누리가 만화방창의 황홀한 빛으로 가득했을 때. 어린 찻잎은 보드라운 속살을 내밀고 참새의 혓바닥만큼이나 작고 여린 신록을 자랑했었다.

'어린잎을 손으로 뭉쳐 쥐면 머리카락 엇 짜놓은 것 같다'고 하신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이다. 하여, 찻잎은 당연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고, 곡우전에 차를 따서 만들었기에 '우전(雨前)이라고도 표현했다. 연푸른색에서 올라오는 향기는 아가의 살 냄새로 가득하다. 한 모금 입안에 물고 있으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달콤함에 침이 고인다. '감로(甘露)'보다 달고 '제호(醍?)'보다 부드러운 이 맛. 그래서 예부터 사람도 귀신도 모두 좋아하는 기이한 물건으로 그 명맥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귀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닐 터. 천혜의 맛을 보존하기 위해 차나무는 혹독한 은신의 과정을 거친다. 겨우 내, 땅속으로 녹아내리는 눈물로 갈증을 해소 하고 더 깊숙이 뿌리내려 양분을 빨아올리며 탄생의 푸른 날을 기다린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10달 내내 양분을 보충하고 살아가듯이.

산과 들이 푸르게 익어갈 무렵. 어린잎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삐죽이 내민다.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아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이처럼 순수하고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 나고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탄생하는 것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일은 없지 싶다.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가끔은. "자연의 위대함은 멈추지 않는 시간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어린 싹은 자연이 주는 햇빛, 바람, 물의 사랑을 받으며 진하게 성장한다. 때로는 잔혹하게 퍼붓는 태양빛에 녹아나고, 거칠게 휘몰아치는 장맛비에 상처받으며 숙성되기도 한다. 온 누리가 단풍으로 물드는 천고마비의 계절. 늙고 푸석해진 몸은 스스로 발효되어 붉은 노을처럼 세상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찬서리 내리는 어느 날. 하얀 겨울 속으로 깊이 침묵한다. 재회의 그날을 위해.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싱그러움, 어머니의 젖내가 그리워지는 풍부한 그 맛.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전. 거기에는 일 년의 풍상 끝에 얻어지는 '우전의 여정 (雨前의旅程)' 이 있었다. 나도 한때는 '우전' 같은 때가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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