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 作, '오대산 1988'

당 필자, 오늘부터 주명덕의 대표작인 '잃어버린 풍경'을 보도록 하겠다. 잃어버린 풍경? 문득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가 떠오른다. 물론 영화를 좋아하는 당신은 데이빗 린치의 '잃어버린 하이웨이(Lost highway)'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주명덕의 잃어버린 풍경(사진)을 보면, 그것이 프루스트의 소설이나 린치의 영화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린치는 '잃어버린 하이웨이'에 시간의 병행이나 교차뿐만 아니라 접합과 겹침 그리고 양면 또한 반복 등의 복잡한 장치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가 사용했던 수법과 닮았다. 그러나 주명덕의 잃어버린 풍경은 그와같은 복잡한 기교들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단절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만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주명덕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풍경-사진들을 그가 지금껏 해온 사진 중에서 "처음으로 나를 찾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나를 찾은 사진? 도대체 어떤 풍경-사진이길래 당당하게 자신을 찾은 풍경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선 주명덕의 초기 풍경사진인 '오대산'(1988)을 먼저 보자. 그 사진은 산의 일부분을 흑백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주명덕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 사진을 "직감으로 찍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설명이나 증명 등을 거치지 않고 곧 사물의 진상을 마음으로 느껴서 알 수 있다(直感)? 그렇다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설명이나 증명 등을 거치지 않고 곧 사물의 진상을 드러낸 것이란 아닌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주명덕은 오대산의 어떤 풍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자신의 이미지를 우연(혹은 우발적 사건)에 맡긴다. 그의 시야로부터 사라져(지나)가는 풍경은 '죽는다.' 아니다. 그 풍경은 '부활한다.' 그러면 지나가는 풍경은 살기위해서라도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자신의 이미지를 죽음에 맡기는 것이 풍경의 살아가기(living on)란 말인가?

그렇다. 사진은 그 지나가는 풍경을 죽임과 동시에 살린다. 그러면 그 사진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체'가 아닌가? 그것은 지나간 혹은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거가 아닌가? 돌아가신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어머니는 사진의 세계에서 살아계시다(이제 우리에게 바르트도 사진 속에서만 살아있다). 사진은 산자를 죽임과 동시에 죽은자를 살린다. 아직 죽지 않은 산자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도 사진을 통해 살아있는 시체로 출현한다.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을 찍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허구라는 대립구조로 포착 불가능한 너무나도 '기표적인 것'이 아닌가? 따라서 사진은 풍경이 죽음을 긍정함으로써 살아가는 주명덕의 '풍경-사진'처럼 '가벼운 기표'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무거움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벼움/무거움이라는 대립 구조로 포착될 수 없는 '너무나도' 가벼운 기표를 뜻한다. 마치 유령(das spectrum)처럼.

유령? 필자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던 '살아있는 시체' 말이다. 그러면 사진은 단지 대명사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명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명사는 대명사가 대리한 명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명사(사진) 그 자체를 뜻한다. 이를테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을 찍은 것이란 점에서 그 풍경의 대명사(pronoun)이고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를 발음하고, 음독하고, 언명하고, 표명하고, 단언하고, 공언하고, 의견을 말하고, 판단을 내리고, 선언하는(pronounce) 사진 그 자체로서의 명사(noun)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실경(實景)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진경(眞景)이란 말인가? / 독립큐레이터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