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 작품 '경주 1997'

필자는 주명덕의 풍경-사진을 보면서 문득 송나라 진욱(陳郁)의 사심론(寫心論)을 떠올린다. 진욱은 인물을 그릴 때 인물의 정신적인 모습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마음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진욱이 말한 '마음을 그린다(心寫)'를 주명덕의 풍경-사진에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心寫)는 뜻으로 읽고자 한다.

그런데 마음을 찍는다는 것이 우선 찍을 대상을 깊이 이해한 후에 가능하다고 흔히 말한다. 따라서 그것이 손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주명덕이 오랜동안 자연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단지 자연을 두루 돌아다녔다고 마음을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많이 본다는 것(혹은 시각적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러한 시각을 버려야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종병(宗炳)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법(應目會心爲理)'을 통해 자연의 풍경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법? 주명덕은 주명덕의 사진집인 '잃어버린 풍경'에 당나라 시대의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스님의 게송(詩) 두 수를 번역하여 실었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 불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 / 귀로 들으려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 눈으로 들어야 참으로 안다 //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 이제 나 혼자 스스로 가니 /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 그는 바로 나이지만 /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동산양개 스님은 선종(禪宗)의 '조동종(曺洞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간주되곤 한다. 동산양개는 스승을 찾아 여러 곳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조(馬祖) 스님의 제자인 남천(南泉)과 위산(僞山) 그리고 위산으로부터 운암(雲巖)을 소개 받아 운암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동산이 운암을 만나 묻기를 "무정(無情)이 설법할 때는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운암 왈, "무정이지 뭐." 동산이 다르게 물었다. "스님은 들을 수 있습니까?" 운암 왈, "만약 내가 들었다면 나는 법신(法身)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자네는 내 설법을 못 듣게 될걸세." 동산은 또 다르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제가 그것을 들을 수 없는지요?"

운암은 먼지떨이를 집어 들었다. "이 소리가 들리는가?" 동산 왈, "안 들립니다." 운암 왈, "자네는 내 설법도 듣지 못하는데 무정의 설법을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동산이 또 다르게 묻기를 무정의 설법은 어느 경전에 기술되어 있습니까? 운암 왈,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시냇물, 새, 나무 등 모두 불법을 외운다고 기술되어 있다."

동산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자리에서 게송 한 수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그 게송이 다름아닌 주명덕이 인용한 두 개의 게송 중에 첫 번째 것이다. 그 게송에서 '설법'을 '사진'으로 그리고 '말'을 '눈'으로 또한 '눈'을 '마음'으로 전이시켜 볼 경우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겠다:

신기하고 신기하구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무정(無情)의 사진(寫眞)이여. 눈으로 보려고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마음으로 보아야 참으로 안다.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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