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이영희

집안에서 키우던 파프리카를 밖에 내놓았는데 누군가 지주목을 세워주고 물을 주어 앙증맞게 여러 개가 달렸다. 들여다보고 있자니 삼계탕이 인연이 된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밭에서 금방 딴 싱싱한 푸성귀까지 덕분에 먹을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얼마 전 땡볕에서 도색을 하는 아파트 경비원들이 안쓰러워 집에서 삼계탕을 대접했다. 그때"이렇게 맛있는 삼계탕은 처음 먹어봐요."라고 해서 정성이라는 조미료를 가득 쳤다고 농을 했다.

공무원(公務員)의 공(公) 자를 붙이면 공자(公字) 삼계탕이 되는데, 발음상 공짜 삼계탕이 되니 더 맛있는 것 아니냐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박장대소를 했다. 유머감각이 대단하신 분이지 싶었다.

시간에 쫓기며 출근을 할 때는 생각도 못한 일인데 퇴직을 하고 나니 조금만 움직이면 삼계탕 한 그릇쯤 뚝딱 대접할 수가 있어서 좋다. 찹쌀을 먼저 불려 놓고 생닭과 황기, 수삼, 마늘, 대추, 은행을 준비하여 끓이면 되니 말이다. 황기와 한약재가 같이 티백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서 다른 재료와 미리 준비해 놓고 당일 생닭만 사 오니 더 수월하다. 다만 큰 솥이 없어서 사용하던 작은 솥 세 네 개에 나누어서 삶아야 하니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시작이 반이라고 한번 해보니 길이 난 것 같다.

처음에는 만만한 여고 동창 모임으로 시작을 해서 라인댄스 동아리 회원, 우리 아파트 경비원과 청소하는 분들로 확대를 했다. 남편은 왜 그렇게 죄 없는 닭을 못살게 하냐고, 누가 보면 삼계탕 특허 낸 사람인 줄 알겠다고 농담을 한다. 여러 가지 일품요리 몇 개를 만드는 것보다 집중과 선택을 하여 보신을 겸했다고 부언을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도 친척이나 이웃들을 정성스레 대접을 하느라 늘 바쁘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나중에 저렇게 바쁘게 살지 않고 우아하게 살아야지 했다. 그런 철없는 소리에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보시라고 말씀하셨다. 딸은 친정어머니를 닮는다더니 지금 내 생활을 보면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거의 판박이같이 바쁘게 산다.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명구를 생각하며, 퇴직 후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책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 1인 1책 강사를 하며 틈틈이 음식을 만들어 나누기로 했다.

청주 시민이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1인 1책 사업을 청주시에서 11년째 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것을 기념하고 시민들이 자긍심을 갖게 하는 전국에 유일무이한 사업이다. 대부분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라 컴퓨터부터 익숙하지 않아 답답하지만, 부모님 생각을 하며 첨삭지도를 하고 있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취합한 올해의 원고를 제출하고 수강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한 분이" 언제 우리도 공자(公字) 삼계탕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손에 물도 묻히시지 않을 것 같은데..."라고 한다. 마침 우리 동네에 친구분이 살고 있어서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흔쾌히 그러마고 했는데 닭에게 살충제를 뿌리고 먹인다는 뉴스가 나와서 머뭇거리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사실 끓여서 먹으니 해는 없을 텐데 찜찜한 마음으로 먹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제까지 국가와 사회의 도움으로 잘 살았고, 퇴직 후에도 연금을 받으며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크고 거창한 일이 아니라도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수시로 찾아본다. 산에 갈 때는 쓰레기봉투를 준비하고 절에 갈 때도 대부분 거리를 두는 해우소 청소를 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백세를 살아보니'라는 저서에서 인생 황금기를 60세부터 75세라고 했는데 우리는 인생의 그 좋은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건강이 허락하지 않을 때 " ~했을걸."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도 살아 있는 날의 가장 젊은 날인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다.

황금기를 사는 사람답게 오늘도 엘리베이터 이용 시 미소를 띠고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작은 습관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들을 버릇없다고 못마땅해 하기보다 나이 든 사람이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게 공존하는 사람의 자세일 것 같아서다.

<약력>

▶1998년 '한맥문학'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 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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