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11.차의 여정(중년의 향기)

숲은 깊고도 은밀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무와 하늘 사이로 흐르는 바람은 소름이 돋을 만큼 상쾌했다. 하늘을 향한 나무들은 서로 키 재기나 하듯 쭉쭉 뻗어 파란 하늘의 그늘이 되고, 나무 마디마디 박혀있는 옹이는 세월의 흔적을 말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어제의 일을 떠올려보니 그리 서운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참으로 깊고 진한 밤이었다.

조금 오르다 보니 나무로 연결된 수로가 보였다. 소여물통같이 생긴 수로로 힘차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살을 보고 있노라니, 강진에서 유배 중에 사용했다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대통 수로가 연상된다. 손을 적셔 맛을 보았다. 달달하다. 다산 선생의 찻물도 이런 맛이었을까. 산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샘물을 대통으로 이어받아서 끓인 차 맛.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어제 마셨던 차 향기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 같다. 그냥 내려오기 아쉬워 세수를 해본다. 매끄럽다. 산의 넉넉함 때문일까. 중년의 생얼도 숲에 가려 맑고 푸르게만 느껴진다.

개원 3년째. 청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조령산 휴양림에서 첫 연수회를 맞았다. 국제차예절교육원에 길이 남아 보존될 뜻깊은 날이었다. 가슴이 설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함께 공유하고, 배운 것을 활용하여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 하나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팀마다 각각 다른 테이블 셋팅 준비에 분주하다. 내츄럴, 심플, 모던한 분위기의 차자리 연출.시대를 앞서가는 차 자리 문화를 공감하고 개성과 감각을 창출해내는 연수과정이다.차 자리의 원칙에 벗어나지 않고 주제나 테마를 살리는 테이블 셋팅.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되는 차 자리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오래 보고 오래 사유해야 되는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스타일리스트였다. 노란 바탕에 파란 매트. 그 위에 간단하게 놓인 찻잔과 다식. 심플하고 발랄한 그 자체였다. 가운데 센터피스 역할을 한 유리 화병의 늘어진 꽃이 청순하게 보인다.

검은색 바탕에 빨간 테이블보. 정말 이색적이다. 강열한 듯 현대 감각이 돋보이는 세련미. 절제된 미속에 중후한 멋이 풍겨지는 테이블 세팅. 맛과 멋이 함께 녹아 나오는 명품의 차 자리에서 나도 명품이 된 것 같았다.

둥근 테이블보에 편안하면서 질서 있게 놓인 다구들. 질퍽한 모양의 다식합에서 따뜻한 우리의 정서가 느껴졌다. 하늘과 지구와 사람이 함께 노닌다는 차 자리의 해설이 자연의 극치였다. 이런 자리의 차 맛은 보나 마나 꿀맛일 것이다. 어느 팀에게 장원의 기쁨을 안겨줘야 할지. 참 흐뭇한 고민이다.

최선을 다한 선생님들의 열기가 고운 한복을 적셨다. 중년이 넘은 나이에 이런 센스와 감성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걸까. 결혼을 하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했던 시절. 그래서 들끓는 나의 욕망과 욕구는 가슴 깊은 곳에 꼭꼭 묻어야 했던 청춘시절. 이제야 그 끼의 보따리를 꺼내 마음껏 풀어내고 즐기는 중년의 삶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쌉싸래한 맛으로 차의 진면목을 자랑하는 중작 같다.

정지연 원장

청춘의 아름다움이 달콤하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 달콤할까. 눈가엔 번지는 세월의 훈장이 묵나물같이 편안해 보이고 머리위에 핀 하얀 박꽃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리는 밤. 계곡의 물소리는 깊어만 가고 중년들의 향기는 짙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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