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박상준 대기자 겸 논설실장

/클립아트코리아

"누구나 한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번은 길을 만든다" 영화 '와일드' 원작자인 세릴 스트레이드의 말이다. 세상을 달관한 선승(禪僧)의 입에서 나올법한 대사다. 멕시코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남북으로 황무지와 사막, 눈 덮인 고지대와 열대 우림, 9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진 4천여㎞에 달하는 태평양 연안 최장거리코스를 홀로 걸은 여성의 말은 무게감이 다르다. 리즈 워더스푼이 주인공으로 나온 '와일드'는 실화다. 세릴에게 길은 인생이다. 그는 삶의 버팀목이 됐던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방탕한 생활로 모든 걸 잃은 여자가 '악마의 코스'라는 말을 들을 만큼 멀고 험난한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한 분투기다.

광활한 평야와 깊은 숲속에선 방향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여러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다. 나침판을 꺼낸다고 길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 지옥처럼 멀고 험한 길이다. 무려 4,285km다. '악마의 코스'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432km인 서울부산의 10배 더 길다.

사람들은 왜 인생의 끝에서 길을 택할까. 그것도 아주 먼 길을. 길을 걷는 것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좌절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거나 술과 노름, 마약등 무엇인가에 중독돼 파멸해가는 경우도 있다. 먼 길을 걷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수반한다. 인내력과 의지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래서 도보여행자들은 수천키로를 걸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검증한다. 문명의 이기(利器)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매일 수십키로를 걷는 것은 고행(苦行)이다. 하지만 PCT에 도전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매일 30㎞씩 150일을 걷는 PCT에는 연간 125만명이 걷는다고 한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세릴은 90일만에 주파했다. 대장정의 끝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을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미국에 PCT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산티아고순례길이 있다.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로망이다. 연간 600만명이 걷는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약 1500km에 이르는 길이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출간된 이후 유명세를 탔다. 언론인 출신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은 직장에서 퇴직한 뒤 이 길을 걷던 중 제주올레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박상준 대기자 겸 논설실장

최근 한국관광공사가 우리나라 둘레의 기존 길을 연결해 만드는 국내 최장 4천500㎞ 걷기여행길의 이름을 '코리아 둘레길'로 확정했다. 이 길은 동해안 해파랑길, DMZ 지역의 평화누리길, 해안누리길 등을 연결한 걷기 여행길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3배에 달한다. PCT 보다도 길다. 정부는 이 길에 연간 550만명 방문해 총 7천200억원의 경제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길엔 '스토리텔링'이 없다. 길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맥락도, 메시지도 없다. 무조건 길만 이어붙이고 이름만 내건다고 사람들이 몰리지는 않는다. 전시행정이 둘레길을 포장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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