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풀어내 예술로 승화시킨 희노애락

한국인의 흥과 한과 얼을 간직한 농악. 2014년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나라 안팎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아리랑 역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인들에게 인정받는 우리민족 고유의 소리가 되었다.

농악은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들이 계승 발전시켜온 대표적인 연희다. 농사를 지은 뒤 제사를 지내거나 북을 두들기며 노는데서 시작되었다. 중국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농악의 기원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삼한시대에 봄의 씨뿌리기와 가을의 농사를 마치면 제사를 지내며 춤추고 노래하는 풍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악의 기원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여름철 농민들이 꽹과리를 치며 논을 맸는데, 이것을 농악으로 부른다고 했다. 꽹과리, 징, 북, 장구 등의 타악기와 태평소, 나발 등의 관악기로 구분돼 있는 농악은 농사를 지을 때 하는 두레농악, 공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건립농악, 마을의 강녕을 기원하는 마을농악 등이 있다. 주민들은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준비하는데 김매기나 농사를 끝내고 농악을 치며 농요를 부르고 술과 음식으로 즐거움을 나누는 풍습이 이어져 왔다.

농악은 지역마다 형태나 풍습이 다르다. 남부지방의 농악은 꽹가리의 기예가 뛰어나고 장고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경상도는 마을농악과 지신밟기를 중심으로 한 농악이 발달했으며 북의 울림이 좋다. 청주농악이 요즘 나라 안팎에서 주목받고 있다. 중국 칭다오와 일본 니가타에서 잇따라 농악을 선보이면서 신들린 몸짓과 흥겨움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상모돌리기와 버나묘기, 그리고 자반을 뒤집듯 몸을 공중에서 회전하고 착지하는 동작을 반복하는 고난도 기술에는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일찍이 한국의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도 청주농악 출신이다. 사물놀이는 꽹과리, 징, 장고, 북 등 네 개의 타악기로 구성돼 있는데 농악과 달리 앉아서 연주하지만 농악의 장점을 모아 공연하기 때문에 흥겨움이 있다. 그의 신명나는 농악은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식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조정래는 "치욕스러운 역사일수록 똑똑하게 기억해야 한다"며 치열한 대하소설 '아리랑'을 펴냈다. 일제강점기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파란의 시대를 살아냈던 민초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투쟁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는데 전라도 김제에 아리랑문학관이 있으며, 뮤지컬로도 선보인 바 있다.

청주아리랑은 중국 길림성 정암촌에서 구전되고 있다. 청주 일대에서 살던 80여 가구의 주민들이 1938년 일제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중국 길림성 정암촌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지독한 가난과 설움과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20여 년 전 충북대학교 임동철 전 총장 등이 중국을 오가면서 확인했고, 이후 청주아리랑을 보존하고 마을과 주민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어령 선생은 "참된 비극은 슬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감추려는 행위 속에 있다. 한국인은 그 비극과 슬픔과 아픔을 춤과 노래와 흥으로 달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아리랑은 설원에 핀 꽃"이라고 했다. 한국 문화를 세계 각국에 전파하는 방송의 이름이 '아리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하찮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되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픔이 묻어있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8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살에 아버지마저 잃게 되면서 어린 시절 가난과 외로움을 주옥같은 시노래로 표현한 워즈워스, 결손가정과 성폭행에 아기의 죽음 등 지극히 불행한 자신의 과거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재탄생시킨 오프라 윈프리, 부모의 이혼과 전쟁 등으로 혼돈의 시절을 극복하고 영화배우와 UN기구의 자원봉사자로 꽃을 피운 오드리 헵번…. 유배지에서, 감옥에서, 초가집에서 희망의 꽃을 피우며 문화예술로 승화시킨 사례는 또 얼마나 많던가. 세상에 하찮게 여길 일은 하나도 없다. 잠들지 않는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청주시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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