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교사 이야기] 감곡초등학교 수석교사 이태동

/클립아트코리아

그녀는 프로였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귀가 많이 보이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다 아는 듯 했다.

"얼마 전 파마하셨지요?" 그녀는 싱긋 웃었다.

머리칼을 서너 군데 들추더니 "커트를 해야겠네요." 나의 동의를 구한 후 "귀 부분은 머리칼이 두꺼우니 인상을 부드럽게 해야겠어요.", "오늘은 제가 손님을 젠틀(gentle)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희망적인 판단을 내려 주었다.

나는 곧 얌전한 소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문가는 역시 달라, 디테일(detail)한 부분까지 꿰뚫고 있어.'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내내 이 사람들의 정체성은 뭐고 '돈'과 '노력', '전문성'과 '결과'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이 끝까지 이끌어내려 하는 혁신적인 사고 과정이 한층 궁금해져 갔다. 현란한 가위질도 찾아 볼 수 없고 수다스러울 만큼 과잉 서비스도 존재하지 않는데….

미용실은 제법 커 우리가 근무하는 교육현장과도 유사했다.(금전적인 측면만 제외하면) 업무가 철저히 분담되어 있고 협력하는 체제인데다 미용도 온종일 선생님들처럼 바빠 잠시 학교와 오버랩(overlap) 되었다. 가게 직원과 손님으로 만나 짧은 순간 서로 소통하며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지켰을 뿐인데…. 그 곳 직원들은 손님들이 음악을 들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조용히 잠을 청하거나 의자에 앉아 직원에게 머리를 맡기거나 모두 함께 한다는 즐거움과 설렘으로 본연의 업무에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저마다 창조적인 일에 몰입하며 미(美)를 찾아가는 열정은 꼭 순례자들 같았다.

학교 배움의 현장도 즐거움과 꿈의 산책로로 차고 넘치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그곳은 큰 미용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이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손님을 도와주려 하는 겸손함까지 갖추었다. 의욕과 성과는 결국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누가 이들을 상업적이라고만 얘기할 수 있을까?

파마는 사전적 의미로 permanent wave다. '머리를 화학 약품과 전열기를 이용하여 구불구불하게 하거나 곧게 펴 그런 모양으로 오래 유지하도록 꾸민다.' 라는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영어로 a permanent, a perm, have one's hair permed 라고도 한다. permanent는 또 다른 의미로 '영구한', '상설의'라는 뜻으로 쓰여 지고 있는 걸 보면 누구나 파마를 할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머리 스타일이 오래 가길 기대하며 꿈의 여행을 하나보다.

오래 전 초임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미장원(미용실)은 남자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여자들이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고 주로 가사나 육아, 여성 문제가 화젯거리인 만큼 총각으로서 견디기 쉽지 않는 자리였다.

그날도 미용실 주변을 몇 번이나 배회했다. 어둠이 찾아 올 무렵 미용실 문을 두드렸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내 순서가 되어 허겁지겁 머리 손질을 끝내고 나왔다. 평소 머리를 툭툭 털고 드라이로 말리면 끝! 하고 외치거나 학생들에게 친밀감 있는 만화 캐릭터로 다가서려고 하는 전략이었는데 그런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너는 앞에서 보면 아저씨! 뒤에서 보면 아줌마!, 무슨 남자 녀석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 파마까지, 꼭 여자 같다는 둥 온갖 놀림과 악평이 무성했다. 그나마 위로라면 위로로 '예술가' 정도였다. 결국 나는 1주일도 못돼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풀어야만 했다. 남들이 원망스러웠다. 조금 튀어 나온 '못'은 망치를 맞고 아예 많이 튀어 나온 '못'은 망치를 맞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면 문제가 있는 걸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파마 사건 이후 나는 내 머리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모험이나 열정도 발휘하지 않았다. 팔팔한 20대 청년의 성장 과정에서 느꼈던 좌절과 충격으로 내 머리스타일은 이대팔(2:8) 가르마에서 변곡점을 찍고 이마가 뻥 뚫린 채 일관되게 살아왔다.

한 인간의 개성과 멋, 건강과 실용성, 상업성과 사회적 질서, 심리·육체적 환경 문제 등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다는 걸 뒤늦게 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반대하던 염색과 파마를 지금은 내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지 않는가. 평가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해, 안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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