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아, 천지다, 백두산 천지다! 나는 감격하여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몇 번을 올라와도 보지 못한다는 천지를 한 번에 보다니. 조상 삼대가 공을 쌓고 착한 일을 해야 알현을 허락한다는 백두산 천지를 목격한 것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중국 쪽에서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가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않으니 마냥 오매불망이었다. 기회는 그냥 오지 않는다. 연인을 그리는 것처럼 마음속에 품고 무작정 기다리다 보면 언제가 때가 온다. 아마도 인연이 무르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5시,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했다. 칠월 막바지 녹음이 무르익어 들판은 검푸르다. 마치 바다 한 귀퉁이가 들어와 쪽빛으로 빛나는 것 같다. 만주 벌판은 정말 광활하다. 아무리 보아도 끝이 없다. 개발 붐이 일어서인지 가끔 공장 지대가 나타나면서 마을이 보인다. 어김없이 적색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중국식 사회주의 가치관을 강조하는 문구다. 자유와 평등이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버스가 어디부터인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우거진 숲길이다. 이제부터 백두산 오름길이다. 한참을 오르더니 평지가 나온다. 이것 참, 백두산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속으로 되뇌며 백두산 천지를 그려보았다. 사람은 오매불망 마음속에 있는 것이 가까워질 때 더 애가 타는가 보다. 좁은 숲길을 휘돌아 돌 때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마치 애인의 옷깃인 양 정겹다.

버스는 쉼 없이 오른다. 한참을 오른 후 밖을 보았다. 장대한 산맥이 펼쳐지면서 곱디고운 운해가 드리웠는데, 난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저 산맥이 백두대간의 시작이란 말인가. 장엄하도도 신묘하다. 산줄기가 첫눈에 보아도 범상하다. 그런데 여기가 백두산 정상은 아니었다. 버스는 오르고 또 올랐다. 정말 대단하다.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이 거대한 산에 길을 냈단 말인가. 만일 길이 나 있지 않다면 백두산을 오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드디어 백두산 정문에 도착했다. 우리에게 백두산이지 중국 사람에게는 장백산이다. 주차장에 버스가 즐비하고 매표소 앞은 인산인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혹시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인가 하고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암만 봐도 왁자지껄 떠드는 폼이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전판 중국 사람이었다. 장백산 지구가 국가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단다.

연길에서는 어디에나 중국말 위에 한글이 적혀 있어 참 좋았는데, 백두산 지구 안내판 어디에도 한글은 없었다. 조금은 서운했다. 한국 사람이 그렇게 많이 찾아왔는데도 한글 안내문 하나 없다니!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긴 매표소 행렬을 지나 정문을 통과하였다. 아, 이건 또 무언가. 셔틀버스를 타고 또 20분 정도를 올라야 한단다. 이 줄도 만만치 않았다. 인원을 하나하나 세어 정원만 버스에 태웠다.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질서를 잡고 있었다.

셔틀버스는 산길 도로를 힘차게 달려 장백폭포 앞에 내려놓았다. 아,장백폭포!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면서 저쪽 한끝에 거대한 물줄기가 보인다. 천지에서 떨어지는 폭포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사람의 행렬이 늘어서 있는데 이것도 장관이다. 걷고 또 걸어 장백폭포 앞에 다가섰다. 하얀 물거품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마치 백의민족의 혼령이 살아나와 나를 향해 포효하는 것 같다.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저 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장백폭포에서 내려와 이제는 천지에 오를 차례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지금 비가 온다면 저 위 천지에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쨌든 오른다. 이제는 10인승 하얀 승합차다. 차량마다 고유번호가 있는데 철저히 순서대로 탑승하고 출발했다. 마치 흰 개미떼가 산등성을 줄지어 오르는 것처럼 행렬이 대단하다. 경쟁이나 하듯 아슬아슬하게 커브를 잘도 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차 안이 야단이다.

최시선 수필가

정상에 오르니 여전히 비가 온다. 먹구름이 천지를 가득 덮었다. 꿈에도 그리던 천지 친견은 이렇게 물 건너간단 말인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한참을 지나니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다. 아, 천지가 보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내게로 다가선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이야!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이다. 단군신화가 서려 있고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중국을 통해 오른 것이 서글프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저쪽 보이는 곳이 북한 땅 천지다. 인적조차 하나 없이 고요하다.

통일 되어 함께 어우러지는 날, 난 다시 천지를 찾으리라. 와서는 두 팔 벌려 마음껏 만세를 외치리라. 그리고는 천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시리라.

<약력>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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