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현도중학교 교장 주형식

영화 화려한 휴가 / 뉴시스

영화 '화려한 휴가'(안성기 주연, 2007년 개봉)와 '택시 운전사'(송강호 주연, 2017년 개봉) 배경은 똑같다. 1980년대 남도지방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로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학생 및 시민들의 항쟁을 그린 영화이다.

두 영화는 10년의 간격을 두었다. 왜 10년의 간격을 두고 나왔을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영화만들기를 한 것일까? 두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 중 가슴아픈 사연을 뒤돌아보자.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라는 말은 당시 계엄군들의 작전암호였다. 전남대 앞에서 학생·시민들은 계엄군으로 달려온 공수부대와 맞서고 있었다. 그럼 최초의 희생자는 누구였을까? 이른 바 '5.18항쟁'의 첫 희생자는 말하는 소리, 총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였다. 말을 제대로 못하던 김경철(당시 24세)씨였다. 광주 백운동 까치고개 부근에 상점을 두고 광주시내의 다방과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 팔던 그는 18일 오후,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다녔는데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 진압봉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더욱 가슴아픈 것은 국군통합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군인으로서 한 쪽에서는 죽이려고 악을 쓰고 한 쪽에서는 살리려고 약을 쓰니 참으로 아이러니(황당)였던 시절이었다.

물론 영화스토리는 사실과 허구가 버무려졌겠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한 '화려한 휴가'였단 말인가. 그저 일상 생활에 충실했던 국민들조차 곤봉, 총칼에 맞아 죽었으니 화려한 휴가 그건 바로 그들만의 인간사냥이었단 말인가!

영화채널에서 우연히 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에 울었다. 뜬금 없이 엔딩부분에서 사진촬영 장면이 나오는데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마지막 항거를 하다 죽은 이들 모두는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주연 안성기(공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도청에서 항거)의 딸 배역으로 나와서, 영화 속 김상경(시민군역) 배우와 극중 연인관계인 이요원(간호사역)이 혼자 쓸쓸한 표정인 채 막이 내리는 모습이다. 영화 마무리 부분에서 이요원은 지프차에 올라 광주 시내를 돌며 스피커 방송을 했다. "여러분 도청에서 항거하는 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그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녀를 빨갱이 또는 여간첩으로 몰았다고 한다. 빨갱이 프레임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택시 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 /뉴시스

이 영화는 당시 영화 포스터 '춘자는 못말려'와 조용필이 부른 '단발머리'가 화면에 깔리면서 시작한다. 필자를 비롯한 구세대 관객은 잠시 회상에 젖을터.

무거운 배경으로 시작한 '화려한 휴가'와 달리 몇 가지 에피소드를 시작 부분에 깔았다. 택시 운전을 하는 배우 송강호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태워줄 택시 기사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찻집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를 만난다. 그는 독일제1공영방송(ARD-NDR) 기자로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으며, 1980년 5월 당시에는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푸른 눈의 목격자'였다.

택시 운전사 역인 배우 송강호는 지금과 다르게 당시 큰 금액인 10만원을 받고, 군경의 통제로 외부지역과 교통이 완전히 단절당한 광주로 잠입 취재하려는 힌츠페터 기자를 태워주기로 했다. 기자를 광주에 내려주고 곧장 어린 딸(사실은 아들)이 있는 서울로 돌아오려는 그에게, 예상하지 못한 여러 상황이 다가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도 서고, 소박한 서민의 가정에서 웃음꽃도 나누고, 항거하는 광주시민들을 북에서 내려온 빨갱이 취급을 하며 무차별 공격하는 군인들도 보고, 어린 학생들의 처절한 외침과 죽음도 접하면서, 택시 운전사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칫 무거운 영화로만 진행되지 않도록 감독은 서민들의 작은 정들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영화가 계속 무겁거나 무섭거나 긴장되거나 간장을 녹이는 스토리로만 이어지면 관객들의 아드레날린은 증가하게 되고,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는 영화보기의 역할을 반감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의식한 감독은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Ice-breaking) 자잘한 웃음꺼리 장면들을 곳곳에 넣었다.

드디어 취재를 마친 기자는 송강호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메모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운전기사에게 당시 담배인 '사복'을 넣어 진짜인지 가짜인지 '김사복'이라는 이름을 적어주었다. 전화번호도 가짜로 적어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통제사회였기에 혹시 경찰이나 정보기관의 사찰(당사자 모르게 은근히 뒷 조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힌츠페터 기자는 내일 오전 11시 일본행 비행기를 예약했지만, 그 예약을 취소하고 오늘 저녁에 일본행 비행기를 탄다. 기자의 출국을 막으려던 권력기관은 뒷퉁수를 맞았다. 일본에 도착한 기자는 곧 독일로 기사 및 화면을 보내고 전 세계에 광주사태를 알렸다. 그래서 '5·18광주항쟁의 전모'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역시 '펜은 총보다 강하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그 후 한국에 귀국한 힌츠페터는 '송건호언론상'을 받았으며, '돈 워리'(걱정마라)와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나는 최고의 운전사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을 태워준 김사복씨를 찾기위해 전화도 여러 차례 했고 수소문도 많이 했지만 그 자신 2016년 1월에 사망할 때(69세)까지, 끝내 찾지 못한 것을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그의 부인은 전했다.

현도중학교 교장 주형식

영화 개봉에 맞추어 한국을 찾은 부인 에델 트라우트 부람슈테드씨는 그녀의 자매, 문 대통령 등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후 '다큐멘터리'(기록영화)가 아닌 일반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남편이 알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특히 2016년 힌츠페터 기자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이 2016년 5월 15일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안치되어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기자는 영원히 한국 땅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광주를 다녀온 택시운전사 김사복씨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김사복씨의 아들인 김승필씨는 여러 언론을 통해 "아버지는 힌츠페터 기자를 광주까지 태워주고온 4년 후인 1984년 12월 19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끔찍했던 장면들을 본 트라우마 때문인지 술을 더 많이 마셨고 결국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더 이상 같은 민족끼리, 백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두손 모아 기원드린다.

[NIE적용-영화토론] 영화를 본 후 줄거리(영화의 구성)를 정리해 보자. 2.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발표해보자. 3. 감동깊었던 영화 속 장면을 소개해보자. 4. 영화 속 한 장면을 통해 자유롭게 토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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