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이번 길은 남다르다. 보름달만큼이나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다. 올해는 온 가족이 함께 소풍 가는 양 길을 떠난다. 둘째 아이 출가 후 사위를 맞이하는 예를 올린 지 삼 년 만이다. 이번엔 첫돌이 채 안 된 외손주도 동행하니 어찌 흐뭇하지 않으랴. 할아버지 마음을 이제야 알듯하다. 성묘 가는 길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다.

종택에서 잠시 한담을 나누고 밭둑 길을 따라 걷는다. 무수한 잡초를 헤집고 나아가면, 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말갈기처럼 힘차게 뻗은 산등성이를 타고 몇 구비를 오른다. 가풀막진 비탈길을 오르며 숨고르기를 반복하다 인내의 끝이 정점에 다다를 즈음 탁 트인 터가 나타난다. 조상의 숨결이 묻힌 산소다.

호젓한 오솔길을 오르며 추억에 잠긴다. 인기척에 놀란 산새가 날아오른다. 산새가 날아오르는 허공에 아련한 유년 시절이 피어난다. 그때도 가을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길이었지 싶다. 아버님 뒤를 따라 연신 땀을 훔치며 허정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골목길에 떼 지어 놀이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심통을 부리던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한숨 고르고 걷다 돌아보니 산색이 가을빛이다. 스치는 바람에 억새의 사운거리는 군무가 장관이다. 지천으로 널린 가을꽃이 날 보라는 듯 손짓한다. 흐벅지게 핀 뚝깔꽃과 참취꽃이 메밀밭처럼 바람결에 넘실댄다. 풀숲을 굽어보니 가을꽃 천지다.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로 유혹한다.

마지막 언덕길을 남겨두고 잠시 쉬는데 딸아이가 숲으로 들어선다. 웬일인가 했더니 들꽃을 꺾고 있다. 하얀 꽃송이가 소담한 털쑥부쟁이와 뚝깔, 참취 그리고 노란 미역취와 마타리 꽃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온다. 할머니 산소에 놓을 꽃이란다. 들꽃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추억들. 어린 시절 조부모님 산소에 꽃을 잔뜩 꺾어 올려놓고 절을 하던 내 모습이 아른거린다.

어릴 땐 성묘 가는 게 참 싫었다. 너덧 살 때부터 어버님 손을 잡고 성묘를 다녔다. 종갓집이라 윗대 조 산소까지 참배하다 보면 거의 한나절이 후딱 지나버렸다. 동네 인근 다섯 군데 종산을 오르내리다 지쳐 꾀가 나서 도망친 적도 있었다. 아버님의 불호령을 들은 후 미욱한 마음을 눅잦혔지만 늘 불편하였다. 여기는 네게 몇 대조 할아버님과 할머님 산소이고, 삶이 어떠했노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수백 번도 넘게 건성으로 들었다. 어린 내게 그런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였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조상님들이 살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님은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설명해주셨다.

어느새 나도 아버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아버님이 내게 전해준 말씀을 들려주었다. 뿌리에 대한 진한 애착이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예전에 그랬듯이 자식들도 내 이야기를 그저 심드렁하니 듣고만 있는 듯하였다. 이야기가 허공에 겉돌았다.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해졌다.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무등을 태운 손주 녀석만 낯선 풍경에 신이 나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성묘란 묘를 보살핀다는 뜻이다. 성묘는 조상님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성묘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조상의 숨결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형제 간 우애를 돈독히 하라는 것이 아닐까싶다. 산소 가는 길을 통해 정을 쌓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성묘 가는 길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지금처럼 근력이 있을 때나 오를까 나중에는 그나마도 어려울 성싶다. 가파른 산비탈을 내 사후에 딸자식들이 얼마나 찾아올는지 의문이다. 속내를 슬그머니 비쳤더니 그런 걱정은 마시라고 사위가 희떱게 너스레를 떤다. 미덥잖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다. 하기야 너희들이 오든 말든 무슨 대수이랴. 묘지에 누운 내가 무얼 알까마는 지금 같은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산소에 이르는 막바지 길은 급경사다. 굵은 마사토가 깔린 비탈길을 오르노라면 숨이 차다. 품 안의 손주 녀석도 무량한 가을볕에 힘이 드는지 징징댄다. 뒤따라 오르는 가족들도 연신 땀을 씻어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산소 끝자락에 서니 "언능 올라와. 다 올라왔어. 어여 힘들 내."라고 손짓하는 아버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강전섭 수필가

산소에 올라서니 천지사방이 환하다. 병풍처럼 늘어선 노송 사이로 부는 청향한 솔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삼백여 평에 마련된 집안 어른들의 유택이 안온하다. 아내가 준비해간 제수를 차린다. 온 가족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로 쓸쓸했던 주변이 활기가 넘친다. 이런 정경이 보기 좋으니 나이듦이리라. 이번 성묫길은 마음이 참 푸근하다.

고사리 같은 손주 손에 가을꽃이 한 움큼 쥐어져 있다. 딸아이 손에 이끌려 묘소에 들꽃을 얹는다. 코끝이 짠하다. 먼 훗날 내 무덤가에도 외손주가 꺾어온 가을꽃이 놓여 있을까.

강전섭 수필가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 청주문화원 이사
▶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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