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최용현 변호사

아테네 / 클립아트코리아

2,500년전 고대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 BC495?∼429)는 자신들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이곳(고대 아테네)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심지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 일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아테네에서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책에 대한 결정을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내리거나 적절한 토의에 회부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과 행동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결과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행동부터 취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고대 아테네는 현대의 우리와 달리 직접민주정체(인민자치)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민회와 공직에 적극 참여하고, 민회나 평의회 등에서 각자가 심사숙고를 하고 다른 시민들과 충분히 토의를 거쳐 정책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나 서사(敍事)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를 단순히 현실정치인의 정치적 수사(修辭)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 말에는 그의 현실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민주주의에서의 '적극적 참여'와 '사려 깊은 심의'에 대한 성찰은, 지난 세기말 등장한 대표적인 진보적?대안적 민주주의 이론인 '참여적/심의적' 모델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참여민주주의를 시민들이 투표에 보다 적극참여하자는 주장 정도로, 심의(숙의, 토의)민주주의를 의원들이 정책결정과정에서 단순다수결에 의존하지 말고 보다 숙려된 토론과 합의를 하라는 주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참여/심의민주주의가 그런 정도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현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나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원천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 캠페인이나 도덕적 설교에 불과했을 것이다. 참여/심의민주주의 이론에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의 독특함이 묻어있다. 고대 아테네처럼 모든 시민들이 직접 모여서(또는 일반인의 성별·연령별·지역별·계층별·직업별 구성 비율에 따라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이 모여) 공동체의 의사나 정책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상정된 의제나 정책을 숙려할 시간과 수고를 강제하도록 하자는,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론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의 대의?선거제 민주주의의 여러 문제, 즉 상층계급과 기업 편향성, 엘리트 대표들의 부정부패,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최용현 변호사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참여/심의민주주의자들의 말하는 이상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의 이상일 뿐이다. 그것이 실현된다고 하여 모두가 동의하는 혹은 최상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에 반대하는 反민주적 보수파로부터 끈임없이 이념적 공세에 시달릴 수 있고, 소수파의 의견과 이해를 온전히 반영할 수도 없고, 반대파의 완고한 반대로 계속 겉돌 수도 있다. 또한 참여와 숙의에 따른 노고와 비용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혹은 기존처럼 최고권력자나 전문가들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나 '최고'는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동의하고 '보다 나은' 만족·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 참여/심의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 정부에서 시행된 신고리원전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우리 역사에서 참여/심의민주주의를 향한 첫 실험이었다. 첫 실험이기에 그리고 극단의 대립을 내포한 의제이기에, 지금껏 과정도, 곧 내놓게 될 결과도 허점투성이고 불만투성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다. 보다 많은 그리고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위대한 첫 걸음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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