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교사 이야기] 청주 각리초등학교 수석교사 박현숙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업습니다 / 클립아트코리아

열흘 전쯤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한 나뭇잎을 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라는 시 구절이 떠올랐었다. 그런데 어느새 산과 들, 가로수의 나무들이 곱게 곱게 물들어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이고 있다. '오매 단풍 들었네~' 가을은 그렇게 깊게 깊게 익어가고 있다.

작년부터 주말농장을 마련해서 몇 가지 농작물과 꽃을 심고 가꾸며 소소한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즐거움 뒤에 힘듦도 있지만 자연과 함께 하며 순간순간 깨달음의 시간이 있어 내적으로 많이 깊어짐을 느낀다.

그 중에 내가 발견한 놀라운 경이로움이 있다. 강낭콩을 심은 지 얼마 안 돼 초록 싹이 쏙쏙 고개를 내미는데 너무 신통하고 기특했다. 연분홍 꽃까지 피우니 얼마나 이쁜지 감탄사를 쏟아댔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직 군데군데 싹이 나오지 않는 곳이 있었다. '강낭콩이 썩었나? 다시 씨앗을 심어야지.' 하며 땅을 팠다. 어머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땅 속엔 반쯤 벗겨진 껍질로 모자를 쓴 강낭콩이 얌전히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내 마음에 쿵 울림이 있었다. 그때까지 땅 속에서 세상 밖에 나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맞아, 이것이구나. 우리는 밖에 나온 모습만 보고 전체인양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이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준비시간이 긴 아이를 보고 왜 이리 굼뜨냐며 채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걸음마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뛰라고 강요하진 않았는가? 책을 줄줄 읽는 아이가 있는데 너는 어째서 아직 글자도 모르냐며 면박주진 않았는가? 그 아이의 무한한 잠재력을 생각하지 못하고 보이는 면에만 치중하여 분별하고 판단하지 않았는가? 너는 우수아, 너는 열등아.

봄 가뭄이 심했던 올해 몇 차례에 걸친 꽃씨 파종이 발아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비가 많이 내린 여름에 꽃씨를 뿌린 것이 작은 싹을 내밀었다. 손가락 한마디쯤 자란 백일홍 천일홍 꽃모종을 애지중지하며 한 포기씩 옮겨 심었다. 요즈음 백일홍 천일홍이 주는 사랑에 주말농장 가는 기쁨이 배가 된다. 늦게 아주 작은 모종을 심은 거라 어찌 잘 자라려나?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정말 놀라운 것이 내 가운데 손가락 길이쯤 자란 천일홍이 보라색 꽃송이를 달은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얼마나 신통하고 앙증맞은지 카메라에 담았다. 갈 때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키 작은 천일홍을 찾아 인사한다. 늦게라도 이렇게 꽃송이를 매다는구나. 보랏빛 꽃송이로 자기 존재를 알리고 내년에도 또 피우려고 하고 있구나. 그 모습이 눈물겹게 신통하다.

흔히 인간의 잠재력을 빙산에 비유한다. 잠재력은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수면 아래 감추어진 많은 부분이라고 한다. 우리 교육의 목적은 수면 아래에 감추어진 잠재력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재촉하는 건 아닌지, 안 나온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며 살아가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무럭무럭 잘 자라고 화려한 꽃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칭찬하며 키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꽃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배움이 좀 늦은 아이, 부족한 아이도 믿어주고 기다려주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이 참 필요한 거 같다. 늦게 싹트는 강낭콩도 키 작은 천일홍 꽃망울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각리초등학교 수석교사 박현숙

1학기 도덕수업을 마치며 내가 변화하거나 성장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설문지에 '흐트러진 나의 마음이 퍼즐조각을 맞춘 거 같다.' 라는 3학년 아이의 답글이 오래도록 내게 감동을 주고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아이가 혹 이 다음 소름 돋는 알파고 제로(만든 지 3일 만에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여 알파고를 100:0으로 이겼다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 줄 위대한 철학자가 될 지도. 지난 봄에 누가 알았겠는가? 나무마다 저렇게 고운 색으로 물들어 반짝일지를. 오매 단풍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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