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헌책방 / 뉴시스

관음죽을 키우는 화분에 금이 갔다. 어머님이 쓰던 시루를 화분으로 사용하던 거라 아쉬움이 컸다. 틈틈이 신경 쓰며 살폈다. 처음에는 굵은 선 하나인 줄 알았는데 실선도 여러 곳이다. 금방 깨질 것 같은 불안함도 잠시, 그대로 잊었다.

지금 베란다는 가을꽃이 한창이다. 잎만 무성하던 곳에 다양한 꽃 빛깔과 향기로 눈도 마음도 즐겁다. 꽃으로만 시선이 오래 머문다. 그런데 관음죽 주변이 환하다. 화분이 깨졌다. 떨어진 조각들로 주변은 어수선하고 서로 엉킨 뿌리는 성난 이빨처럼 속을 드러냈다. 사이사이 검은 흔적을 본다. 화분이 좁다는 이유로 새싹이 올라오면 베었다. 모진 내 손에 잘리어 죽은 싹 사이로 새로운 싹이 꼿꼿하게 고개를 세웠다. 화분이 깨지지 않았다면 그 싹 또한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 분갈이를 해주는 이동식 플로리스트가 근처에 왔다. 좀 더 큰 화분으로 관음죽을 옮겼는데도 버려지는 것들이 수북이 쌓였다. 뒷정리하면서 어떻게 할 거냐고 재차 묻는데 대답 못 하고 머뭇거렸다. 빗자루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순간 쓰레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두 개 화분을 놓기는 베란다공간이 비좁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깨진 시루만 쳐다봤다.

곁에서 한참 흥정하던 중년 여인이 빈 화분이 많다며 주섬주섬 자기 쪽으로 옮긴다. 붉은 매니큐어 손톱이 길다. 주고 싶지 않았다. 첫째는 화초 이름을 묻지 않았다. 기르고 싶은 애정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두 번째 빈 화분이 많다는 것은 욕심이 많아 분별없이 사들였으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화초일지라도 빠른 호기심은 금방 시든다. 또한 공짜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방 버릴 확률이 높다.

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책 받는 기쁨이었다. 회원들의 개인 저서며 문학단체 동인지와 정기간행물까지. 책을 직접 받거나 우편으로 발송된 책을 보면 발걸음도 가벼웠다. 나에게 책은 힘이었고 위안이었으며 꿈을 꾸는 이유였다. 가끔은 마음의 사치이기도 했다. 읽지도 않으면서 쌓아두는 것으로 만족했고 한 끼 밥보다 포만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지금은 짐이 되었다. 소박했던 마음은 색 바랜 책처럼 변했고 책으로 가득한 방에서 누리는 호사보다 공간의 여백을 갖고 싶었다. 버리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미룰 수 없었다. 예전에 보아서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먼저 집었다.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모르는 책도 있다. 소식을 알 수 없거나 이름도 생소한 작품집은 생각에 잠긴다.

정리하면서 생각한다. 내 책도 누군가한테 가서 버려지겠지, 또는 버려졌겠지. 첫 번째 수필집은 출판기념회를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지원금을 받은 작품집이라 자부심도 있었고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창작지원금이 많았기에 욕심껏 책을 발행했다. 지금 남아 있는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수필집도 명함처럼 기분 좋게 나눠주었다. 가끔은 세 번째 수필집을 기다린다는 안부를 받는다. 지인의 서재에 내 책을 꽂으려고 비워놓았다는 애정의 독촉도 받는다. 그러나 내 곁을 떠난 책에 대한 두려움은 늘 있다.

그즈음 산속에 헌책방이 있다기에 찾았다. 소문난 곳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새로운 길을 만든다. 정말? 의문과 왜? 호기심은 길이 되었다. 영화촬영도 하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면서 바람 소리만 잠길 것 같은 곳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찾는 사람의 마음은 새롭고, 책은 지난 시간 속으로 맞이한다. 빠르고 새로운 것에 더 자극적인 지금, 산속 헌책방은 문명을 벗어난 듯하지만 오히려 흥미를 자극하는 진수가 엿보인다.

책방은 현재를 잊게 한다. 오래되어 변하고 낡았지만 찾기 쉽게 분류해 놓은 책 길을 따라가면 칸마다 책 냄새가 다르게 느껴진다. 이끼 냄새도 나고 잘 발효된 냄새 같기도 하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전체를 밝혀주지 못해 어둡다. 부족한 공간에 쌓아놓고 흩어진 책들이 흐릿한 빛에 정겹다. 주인은 헌책을 찾는 주문이 많아 바쁘다고 한다. 버려져서 잊은 책들로 모인 부동의 책방일 거로 생각했는데 변화하는 공간이 새로웠다. 헌책방에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조영의 수필가

관음죽은 오랫동안 지켜봐야 안다. 竹이지만 마디 구분이 없고 줄기는 실 가닥 같은 것으로 감겨있어 거칠다. 꽃도 자주 피우지 않는다.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풀줄기 같아서 지나치기 쉽다. 손바닥처럼 펼친 이파리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물도 자주 줘야 한다. 예쁘지도 않은 것이 번거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물을 줄 때 이파리와 물줄기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는 기분을 좋게 한다. 또 자라는 것을 느낄 만큼 성장이 빠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가까이 갔다. 주는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 것이다. 공짜가 아니라 나눠 받았다고 하면 생각은 달라진다. 이유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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