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세평] 이종수 청주 참도깨비도서관

속리산둘레길 / 중부매일 DB

일만 하던 아내가 올레병에 걸렸다. 제주 올레길을 2박 3일 동안 걷고 오더니 다시 가고 싶다고 한다. 지난 해 내가 하루 종일 걷기 위한 방편으로만 갔을 때는 심심하게 걷기만 하는 게 뭐 대수냐고 하더니 마음이 달라졌다. 걸어본 자만이 아는 일이다. 협재 지나 어느 길에서는 개 한 마리가 길동무를 해주었다고 하는 것도 믿기 어려웠던 아내가 길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노지 술의 발견이다. 노지(露地) 딸기 할 때의 그 노지 술이다. 하루 종일 걷다가 음식점에 들러 찌개 하나 놓고 먹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술이 아니라 그냥 술 한 잔. 제주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 점빵 나무 진열대에서 막 꺼내 먹던 술을 노지 술이라고 부른다니, 새로운 단어를 발굴한 것처럼 기뻤다. 낮술이든 저녁술이든 노지 술로 먹고 나면 파도 소리에 절로 깨어 더 맑아지는 제주 바다를 아내도 느꼈던 것이다.

길 위에서 사람은 가장 사람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문명의 도구라고는 신발과 옷과 가방만이 있고, 몸이 허락하는 대로 걸을 때 잡스런 생각이 지워지고 바다가 보이고 길이 보이고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광활한 자연이 보이는 것임을. 소설 '와일드'가 그렇고, 길의 인문학 '파타고니아'가 그렇다. 노지란 말에 들어간 이슬(露)의 길에서 사람이 완성되는 것이지 않을까. 노지 술은 그저 방편일 따름이다. 둘레길도 좋고 골목길도 좋다. 육거리 시장에서 만나 육전반상에 앉아 가물치 낮잠 자는 동안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 혼술도 좋다. 조용히 음미하며 한 외로움이 또 하나의 외로움을 불러 마셔도 좋다. 길 위에서라면 금세 걸으면서 지워지고 오롯이 내 몸이 읽어가는, 밟히는 족족(足足) 새로 써가는 것이니.

속리산 둘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도 추천할 만하다. 되도록 풀이 난 흙길을 밟으며 발의 피로를 풀어가며 길과 하나가 되는 느낌만 있으면 된다. 일만 하는 아내가 자신에게로 돌아가 고요와 평화를 얻으려고 하듯이. 달팽이가 지나간 길을 바라보며 달팽이를 이해하듯이. 우리는 더 걸어야 한다. 오래 전 중국 계림 가는 길에서 버스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곳 아이들이 먹이던 감자처럼 우리는 좀 더 감자를 먹어야 한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좀 더 욕을 먹어야 한다. 길에게 욕을 먹어야 한다. 서로에게 욕을 더 먹어야 한다. 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깔고 살아서 건너는 목숨들을 죽여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종수 시인

아무튼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나와 친해져야 하고 지긋지긋해지다가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노지 술 한 잔 걸치고 지는 해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나붓하게 깨고 나서 밤별을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또 한잔의 노지 술을 나누면 더 좋겠다. 노지에서 노지 술을 마시는 일이니 가뿐하게 깰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서로의 눈빛을 읽으며 오늘 하루 욕봤다고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골목길의 김치찌개와 장떡의 새로운 발견이 있고 사람의 만남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의 노지를 술술 걷고 또 걸으면 좋겠다.

반가운 사람일수록 길에서 만나길 바란다.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노지 술도 반주로 한잔 마시자고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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