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여기저기 알곡을 거두는 손길이 분주하다.

'도란도란 이야기 문학카페' 우리들의 수필교실도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각자 한 해 동안 써온 글 중에서 책에 실릴 원고를 골라내어 교정을 보는 일이다. 쌀에 뉘 고르듯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자니 글자들의 조합이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완성된 글을 만들어 내기까지 조화로운 글자들의 관계 맺음이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서는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겅중거리는 자음은 어미인 모음의 힘을 빌어야만 비로소 글자 구실을 한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부모 자식의 관계를 보는 것이 재미있다.

이목구비가 갖춰진 온전한 글자라 하더라도 누구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올바르고 예쁜 단어가 되는가 하면, 말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문장 안에 제대로 들어앉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가다 좋은 문장이다 싶은 곳이 있으면 제 깜냥은 생각지도 않고 되도 않는 녀석이 척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있다. 세밀한 교정에 이르면 여지없이 뒷덜미가 잡혀 나오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우선 좋은 자리는 앉고 보자는 심사다. 이는 글자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다. 사람살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리든지 있어야 할 사람이 있을 듯이 있어야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문단(文段)에서는 움직임이 더 크다. 그저 한두 자, 한두 단어 빼고 보태서 될 일이 아니다. 뭉텅이 뭉텅이 살림을 내기도 하고, 끌어들이며 단락을 분명히 해야 집안이 선명하고 질서가 잡힌다. 제 집만이 평화롭다고 세상이 다 화평하다 볼 수는 없다. 이웃 문단과의 자연스런 유대관계가 중요하다. 더불어 손잡고 가야 전체적으로 조화와 통일감을 느낄 수 있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까지는 한 글자 한 글자도 중요하지만 쉬고, 띄고, 숨고르기를 해가며 전체적인 흐름이 자연스러운가를 우선 봐야 할 것이다. 매끄럽게 잘 읽혀도 그 글의 얼굴은 제목이다. 글과 제목의 어울림도 둘째가라면 서운할 일이다.

외형이 잘 갖춰지고 손색없이 글이 다듬어졌다 해도 내포된 내용에 진정성이 없거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드러나 있지 않으면 생명력 있는 글이라 할 수 없다. 살펴봐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눈과 손이, 뇌가 바쁘다. 책 한 권, 아니 글 한편 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죽하면 글을 낳는다고 하며 산고에 비유했을까.

지난달, 산 녘에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 할 무렵 문학카페 글벗들과 강원도 '김유정 문학촌'과 인근에 있는 '책과 인쇄 박물관'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은 김유정 문학촌이었는데 책과 인쇄박물관에서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문학관과 걸어서 10여 분 정도의 거리다.

도착해 보니 건물부터 특별했다. 책장에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문학과 건축의 만남이 한편의 예술이다. '그리움이 쌓여 시(時)가 된 박물관'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든다. 시(詩)가 아닌 시(時)의 표기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우리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은/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만든 인쇄공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꿈 꿔왔던 사람들의 영혼이…"

이곳 박물관장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글귀가 우릴 맞는다.

1층에는 한때 그가 운영했던 광인사 인쇄공소 재현과 인쇄 활판기의 전시실이다.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전상이 한 눈에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초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반갑게 눈인사를 건넨다. 특히 박물관장이 직접 유럽의 인쇄박물관에서 체험하고 인쇄해 온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 인쇄물을 볼 수도 있다.

2층은 '훈민정음' 등 각종 고서의 장이 펼쳐져 있다. 3층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간본 등 흔치 않은 근현대 책들이 고고하게 앉아 있다. 오랜 시간 발품 팔아온 쥔장의 정성이 엿보인다.

활자들이 모여서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우리들 삶의 역사가 될 것임을 알기에 책과 인쇄가 더 가치롭게 느껴진다.

누군가 그랬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고

오늘 눈 빠지게 글자들 사이를 유영하며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도 훗날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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