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기사와 직접 관련 없습니다. (분교 자료 사진) / 뉴시스

1967년 10월 25일 오전 11시 전교생 313명과 교직원, 그리고 지역 유지들이 모인 가운데 학교운동장에서 무후자(無後子) 27위에 대한 제례를 올린다.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지만, 자신들처럼 까막눈을 면하게 해달라고 학교를 세우는데 쓰라며 기꺼이 희사한 고인들의 숭고한 정신과 넋을 기리는 자리다. 심심산골에서 교육혜택을 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백년대계의 터전을 마련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주었음에 고마워하며, 그 뜻 이어받아 국가발전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후 댐 조성으로 수몰되어 학교도, 합동묘소도, 제례단도, 명당 잡아 평안히 잠들어 있다. 그 덕으로 가르침 받은 이들이 잘 자라 나라위한 큰일을 하고 있다.

일제치하의 독립을 위해 재산과 목숨 바쳐 일한 이들의 후손들은 독립이 되고 새 세상이 되었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생계지원은 고사하고 관심에서조차 멀어진지 오래다. 눈에 흙이 들어간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은 통한으로 우리의 내일을 걱정한다. 다음엔 이 나라를 누가 지킬 것인가!

국민문화증진을 위해 독지가가 희사한 토지에 세운 학교가 반세기가 지나 학생 수 감소로 폐교되어 문화시설로 일반에게 매각되자 생계가 극빈하게 된 그 후손이 찾아와 기증목적이 달성되어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토지 주인에게 재산을 돌려달란다. 선공후사로 일했던 조상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의 나는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데. 일백여 호의 큰 동네 노인들이 모여 쉴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구순노파의 아들이 자기 땅에 자비로 경로당을 지어서 동네에 내놓아 잘 활용하다가 최고령의 노파가 작고하니 그 아들이 자기아들 직장 따라 이사를 가야겠다며 경로당을 매각한다고 한다. 할머니 산소엔 아직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연탄배달을 하며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운전병으로 근무하다 전역 후 중장비운영에 눈을 떠 재산을 많이 모은 청년 실업자가 장학회를 설립하여 가난해서 공부를 더 못하는 농촌학생들에게 대학졸업까지의 학비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혜택을 받아 학업을 마치고 취업한 장학생들은 감사의 뜻으로 자기가 받은 장학금을 매년 조금씩 갚는다고 한다. 장학기금도 늘어나고, 장학생과 장학금액도 늘려서 지급하니 기부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청소년기에 쓰라린 가난을 딛고서 다진 향토기업인의 굳센 애향애국심의 발로였으리라. 사람들은 이런 분들을 나이가 적어도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대가를 바라고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신의 일상을 아끼고 쪼개면서 고통을 겪는 동포를 도와 살 길을 밝혀주었고, 도탄에 빠진 국민을 건져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이끌어 온 순수한 희생의 봉사였다. 그들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함은 잘 알면서도 그로인한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돕는 일엔 왜 그리도 인색한지. 나를 버리고 구국일념으로 혼신을 다해 이 산하를 지켜온 성자 같은 영령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지켜보고 있을까!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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