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클립아트 코리아

충주시 지현동의 '사과나무 이야기길'을 탐방하기 위해 근처 초등학교 학생 180여 명이 주중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벽화 보수작업도 있었고 해서 미리 살펴볼 겸 재능기부를 해 주실 분과 함께 돌아보기로 했다. 테마가 있는 '사랑이 꽃피는 계단'을 오르려 할 때였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하며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하는 여자가 뛰어왔다. 그 여자 뒤로 한 남자가 뒤따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여자를 등 뒤로 세우며 남자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누구세요?" 남편이라고 대답하는 남자와는 달리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인은 아니라며 도리질을 한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가운데 약간의 불안감이 스쳤다. 지나가는 차를 무조건 세웠다. 다행히 자동차는 서 주었고 차창을 내린 남자 운전수에게 상황설명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 뒤쫓던 남자는 멋쩍은 듯 돌아섰고 경찰에 신고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피해 여성을 대신해 신고를 해 주었다.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에게 물으니 헤어진 옛 남자 친구라고 한다. 삼십 대 초반쯤 보이는 그녀는 근처 원룸에 살고 있는데 아침에 퇴근을 하고 보니 유리창문을 깨고 남자가 들어와 있더라는 것이다. 다툼이 있었다는데 목 주변에는 빨갛게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매스컴에서만 듣던 데이트 폭력을 현장에서 보고 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뒤 출동한 경찰에게 여자를 인계하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움을 준 운전수에겐 끝까지 함께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제 가셔도 된다고 하니 경기도 구리시에서 '사과나무이야기길'을 찾아왔다며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런 기막힌 타이밍이 있을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일부러 찾아왔다는 부부에게 필자가 벽화 해설사임을 밝혔다.

어차피 새로 보수된 벽화를 둘러볼 참이었으므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사과나무 이야기길에 그려진 벽화를 해설해 주며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길도 안내해 주었다. "착한 일을 하였더니 이렇게 복을 받는다"며 부부는 연신 즐거워하였다. 벽화 꾸미기에 참가한 충주 작가들의 애향심에 대한 자랑에 감탄도 아끼지 않고 경청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벽화 골목길을 걷다가 시끌벅적하게 김장하고 있는 집을 지나게 되었다.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려 하는데 주인아저씨께서 발길을 잡는다. 주말을 맞아 온 가족이 모여서 김장을 하고 있으니 따뜻한 수육에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고 하신다.

김순덕 수필가

사양하였지만 이미 손에는 김치 한 사발에 상차림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렇게 대가족이 모여서 김장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자리를 잡는 부부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주인 아저씨도 온 가족이 모여서 김장을 하는 화목한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셨을지도 모르겠다. 구리시에서 이곳 충주 '사과나무 이야기길'을 찾아오신 관광객이라고 소개를 하니 더 반갑게 대접을 해 주셨다.

김장은 주부들에게 있어서 연중 큰 행사이다. 김장이 겨울의 반 양식이라고 할 만큼 예전에는 품앗이로 온 마을에 잔치 같은 나눔의 상징적 정서가 있었다. 따뜻한 수육을 배추잎으로 감싸 한입 가득 입에 넣으니 긴장과 추위가 녹는 듯했다. 그 어떤 유명한 맛집 보다도 좁은 골목길에 앉아 맛본 충주의 정(情)맛이 최고라며 다시 오고 싶은 곳이라고 말하는 관광객, '사과나무 이야기길'에 흐르는 주민들의 작은 관심과 나눔이 잊지 못할 특별한 여행이 되었다며 엄지를 척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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