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경이롭다. 장마와 태풍과 태양의 계절을 지나니 높아진 가을하늘에 눈이 시리다. 이처럼 자연은 엄연하다. 녹음으로 가득하던 대지도 붉게 물들고 있으며, 은빛 물결로 가득한 억새밭이 바람에 흔들리며 길 가는 나그네의 무심한 눈길에 답할 뿐이다.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어본다. 맑은 기운이 뼈와 살과 피와 심장 속으로 쏟아진다. 그래서 가을은 시인의 계절이요, 풍요의 계절이며, 여행의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배낭을 멘다.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사랑노래를 부르며, 꺼져가는 내 삶의 어두운 모퉁이에 등불 하나 켜고자 한다. 대자연의 숲으로 여행을 떠나고, 축제의 바다로 나의 모든 것을 맡긴다.

속리산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달려온 물줄기가 유난히 맑고 알차다. 그 물줄기를 따라 하천에 버들강아지가 춤을 춘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잎들이 빛을 튕겨내고 그 빛들은 물살과 마주치는 게 여유롭고 마뜩하다. 잎들이 흔들리면 물 위의 빛들도 함께 흔들리고, 작은 개울물이 물결치면 햇살은 자지러지듯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그렇다. 빛들은 온 몸을 다해 바람과 부딪히고 부서져야만 다시 태어난다. 물결치고 흔들리며 햇살이 튕겨져 나오는 순간을 보면서 바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쏟아지는 바람과 햇살 속에서 낭창낭창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흔들리는 왕버들 잎을 통해 저것들의 눈부심과 찬연한 색깔을 보았다. 선병국가옥 입구에 있는 냇가에서 발견한 자연의 미학이다.

한옥을 이루는 재료는 흙 나무 종이가 기본이다. 이것들을 장인의 기예로 다듬고 바람과 햇살같은 천지음양의 기운을 넣어 만든다. 대자연을 한 채의 집으로 옮겨 놓았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한옥을 그리워하고 궁여지책으로 한옥아파트를 짓겠다며 아우성이고 전주나 안동 같은 곳에서 고택체험을 즐기려는 것도 자연의 숨결과 장인의 미세한 떨림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옛 서민들의 집은 황토 흙에 볏짚을 썰어 버무린 흙벽돌로 지었다. 집안 습도 조절과 항균 및 탈취작용에 황토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흙벽돌을 쌓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덧바른 뒤 한지도배를 했다. 한지는 그 쓰임이 오달지게 많았다. 창호지로 쓰면 방안에서 햇살과 달빛을 그대로 담을 수 있고 자연채광의 효과까지 있었다. 어머니는 매년 여름이면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창호문에 한지를 바른 뒤 봉숭아 잎을 따서 붙이곤 했다.

한옥의 위엄은 기와에서 찾을 수 있다. 건물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엉으로 인 초가집을 새로 단장할 때나 한옥에 기와를 입힐 때는 동네 사람 모두가 힘을 모았다. 일종의 두레와 같은 것이다. 기와를 올릴 때에는 기와를 전문으로 하는 제와장(製瓦匠)이 큰 소리를 친다. 빗물이나 습기가 새어들지 않도록 하고 목재의 부식을 막을 수 있도록 꼼꼼하게 씌어야 했기 때문이다. 찰진 진흙을 물과 반죽한다. 나무로 만든 틀에 넣어 틀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운 뒤 방망이로 두들겨 말렸다. 그리고 건조된 기와는 가마에서 1천도 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냈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서로 짝을 맞춰야 하고 양쪽에는 용맹스런 치미(?尾)를 세워 귀신이나 액운을 물리쳤다. 연가(굴뚝)와 장독대와 담장, 우물과 외양간을 차례로 만들면 집이 완성된다.

한옥이야말로 사람들의 온기와 사랑, 그들의 열정과 지혜, 삶과 문화의 산물이다. 조촐하고 의젓하며 한국의 자연풍광을 닮았다. 물론 한옥이라고 다 똑같지 않다. 집안의 내력과 고단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는 희망의 끈, 그리고 그들만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몸속에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생활미학을 담고 있는 한옥 DNA를 품고 있다.

 

보은군 외속리면 하계리의 선병국 가옥은 1919∼1921년 사이에 지어졌다.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서,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기의 대표적 건물이다. 99칸의 기와집과 낮은 돌담과 숨쉬는 옹기와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오래된 감나무가 나그네를 반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골기와는 투명하며 고요하다. 용마루 선은 처녀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처마 끝은 그 시선이 삼엄하고 산과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니 100년의 세월이 삿되지 않은 것 같다.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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