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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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면서 늘 간직하고 싶은 경구를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마치 우거진 정글을 헤매다가 길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희망의 등불이다. 앞을 환히 밝혀주니 얼굴 없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요즘 우연히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란 성어를 만났다. 순간 아! 하면서 감동이 일면서 희열이 솟았다. 왜 나는 아직까지 이런 말을 몰랐을까 하는 성찰도 했다. 검색해 보니, 중국의 격언으로 명나라 말기의 서화가인 동기창이 즐겨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에 남아 있다고 한다.

모름지기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어라! 어찌 이 말을 이번에 처음 들었겠는가. 들었어도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헛일이다. 어떤 말이라도 자신에게 날아와 확 꽂힐 때 스파크가 일어난다. 아마도 지천명을 넘어 세월을 좀 살다보니 이 말이 절절히 다가왔나 보다. 만권의 책을 읽어야 하고, 만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 고개가 갸우뚱한다. 만권의 책이면 얼마의 양이며, 만리는 어느 정도의 길인가.

독만권서, 행만리로! 이 말은 하나의 경구라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만권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하고, 만리 정도는 걸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말을 두고서 두 갈래로 해석이 갈린다. 하나는, 만권의 책만 읽어도 만리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책만 읽어서는 안 되고 여행을 하면서 직접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독서를, 후자는 체험을 중요시한 해석이다.

가만히 보면, 두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좀 더 방점을 둔다면 나는 후자에 두고 싶다. 아무리 독서를 통하여 지식을 넓혔다 한들 체험을 통해 체득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체험이 없는 앎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자칫 경전만 달달 외는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본다. 나는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었는가? '만(萬)'이라는 말은 단순히 숫자의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량없이 많다, 또는 그 정도의 노력'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만권이면 정말 엄청난 분량이다. 요즘은 박스로 구분하지만 옛날 같으면 몇 수레는 될 것 같다. 서가에 꽂으면 자그마치 그 둘레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또 만리는 얼마의 길이인가. 우리 한반도가 삼천리라고 하니 그 세 배가 넘는 길이다.

어렸을 적부터 책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많이는 읽은 것 같다. 물론 교과서도 포함해야 한다. 허나 지금 보면 안 읽은 책이 훨씬 많다. 당장 내 서가에 꽂혀있는 중국의 고전, 불교 경전을 읽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을 도대체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다. 사 놓은 지 한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책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좀 읽기 시작하면 졸리기 시작하고 궁둥이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좀 걷다보면 다리가 아파오고, 이내 지쳐버린다.

한 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학교로 간 붓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현장 교사가 썼다하여 적잖이 주목을 받았었다. 지금 고백하건대, 책을 내고 한동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책을 읽고 사유한 후 이 책을 썼지만, 정작 붓다의 고향인 인도에는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인도 배낭여행을 다녀오기로. 17일 동안 붓다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걷고 또 걸었었다. 그렇게 하니, 내가 책에 썼던 많은 것들이 살아서 나타났다. 붓다의 탄생지 네팔 룸비니,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보드가야, 누워서 열반하셨다는 쿠시나가라 등을 직접 밟아보니 그냥 알고 있던 지식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행만리로'를 실천한 셈이다. 아마도 어림잡아도 만리는 간 것 같다. 비행 거리와 인도에 가서 열차와 버스로 이동한 거리를 따지면 더 될 듯도 하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서 체험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지식이 될 수 없다.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특히 그렇다. 교단에 서서 직접 겪은 것을 말하는 것과 어디서 읽은 것을 말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최시선 수필가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적어도 일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93년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의 논문에서 최초로 밝혔고, 말콤 글래드웰이 그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졌다. '일만'이라는 법칙은 이론적으로도 밝혀졌던 모양이다.

더 읽고 더 걸어야겠다.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간 곳보다 가보지 않는 곳이 더 많다. 이것이 결국은 지행합일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시선 수필가 약력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수필집 '삶을 일깨 우는 풍경소리'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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