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숨결을 담아낸 장인의 탄생

낙엽도 지고 햇살도 궁핍하고 성근 가지에 찬바람만 심술궂다. 한 해의 끝자락,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여기까지 와서 보니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다투며 피땀 흘려 일군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 아닌가 싶다. 괜한 욕심과 욕망으로 내 청춘을 방기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한 해의 끝자락에 묵상한다.

길을 나섰다. 오늘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지, 삶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답하는 여행이다. 길을 나서는데도 전략이 필요하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단연 홀로 나서는 것이고 자연을 벗하는 것이며 선인들의 지혜를 만나는 것이다.

보은이 바로 그런 곳이다. 겨울로 가는 숲이지만 깊고 느리며 풍요롭고 포근하다. 천년 고찰 법주사는 모든 욕망을 부려놓고 삶의 지혜와 구도자의 곡진함과 천년의 향기가 난다. 법음 소리 울려 퍼지고 향을 사르고 등을 밝히면 나는 온 몸이 정지된 듯한 비움의 세계에 서 있다.

생각해보니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다. 자연은 억만년을 이어오면서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돼 왔다. 그 속에 수많은 생명이 잉태되고 수런거린다. 춤추고 노래하며 생명을 찬미한다. 그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이 창조성의 발현이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한 뒤 "보기에 참으로 좋더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예술가들은 자연속에서 영감을 얻고 소재를 찾는다. 본질을 잊고 사는 중생들을 위해 본질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삶의 지혜와 삶의 여백과 삶의 의미를 만들어 준다. 공예가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공예의 어머니는 자연이다. 자연의 숨결을 받아 삶이 되고 문화가 되며 예술이 된다. 쓸모있는 예술이 바로 공예인 것이다.

보은지역은 자연성을 기반으로 전통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장인들이 많다. 울울창창 숲이 있고 천년고찰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이다. 붓다의 법음이 담겨있고 가르침과 깨우침이 있으며 정성과 공경(恭敬)의 마음이 있다. 오늘은 보은 무형문화재의 이야기 곁으로 가자.

목불조각장 하명석

목불조각장 하명석

그의 손은 날렵하고 눈은 독수리처럼 매섭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를 만나면 최고의 조각예술이 된다. 천진난만한 동장승이 되고 득음의 여래가 된다. 마른 나무가 웅장하고 기품 있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명이 된다. 어떻게 가능할까.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듬기 때문이다. 삿된 마음을 하나씩 걷어내고 찰진 마음만 담는 것이다.


낙화장 김영조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그림을 그린다. 나무도 좋고 종이도 좋고 가죽도 좋다. 그의 손에 인두만 있으면 새의 깃털처럼 춤을 춘다. 순식간에 사람의 얼굴이 되고 하나의 풍경이 되며 약동하는 자연이 된다. 하얀 연기가 피어나는가 싶더니 검붉은 꽃이 피어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없다. 손끝의 예술이 위대하다. 신비한 경험이다.


각자장 박영덕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 말을 기록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끝없이 진화해 왔다. 나무에 글을 새기고 문양을 입히는 일은 한 사람과 한 시대의 영혼을 담는 일이다.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담아내기 위한 그간의 노정이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그 곡진함을 생각하며 경배를 한다.


야장 유동렬

쇠는 차갑고 거칠다. 그 물성에 장인은 두드린다. 두드림의 비밀을 아는가. 그 비밀의 문이 열릴 때 쇠는 부드러워지고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무기가 되고 연장이 된다. 우리의 삶을 밝히는 촛대가 되기도 한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푸른 녹이 스며들어, 빛의 일부를 이룬다. 그의 손은 굳은살 박인지 오래지만 그 대가는 영롱하다.

지금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서 있다. 역사의 상실, 자연의 상실, 사랑의 상실…. 본질이 하나씩 상실되고 있다. 신발끈 조여매고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나서자. 본질을 찾아 길을 나서자.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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