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 作, '굿바이 파라다이스' <1993>

구본창의 '굿바이 파리다이스'는 다양한 나비들을 '박제'시킨 작업이다. 오잉? 사진작가의 작업이 '박제'작업이라니? '사진'과 '박제'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우선 구본창의 나비 박제를 살펴보자.

당신도 알다시피 살아있는 나비는 핀으로 고정시키기 힘들고, 죽은 나비는 몸이 굳어져 자칫하면 다리나 날개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렇다면 구본창은 포르말린이나 알콜 혹은 살충제를 넣은 독병 안에 살아있는 나비를 넣어 죽인 것일까? 죽은 나비의 날개를 조심해서 표본핀셋을 이용해 전시관에 가져간다. 그는 가늘고 긴 표본핀으로 죽은 나비들을 하나씩 전시판에 꽂아 놓는다. 그렇게 박제된 나비들이 표본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아니다! 구본창의 '굿바이 파라다이스'는 박제된 나비들을 '다시' 박제시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요? 이를테면 박제된 나비들을 구본창이 사진으로 찍은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굿바이 파라다이스'는 전시판에 표본핀으로 박제된 나비들을 찍은 사진들로 대체되어 있는 셈이다.

사진은 일종의 '박제'라고 할 수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박제는 죽은 나비를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박제는 나비의 어느 한 순간을 고정시켜 놓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진 역시 한 순간을 포착해 고정시켜 놓는다. 따라서 구본창의 '굿바이 파라다이스'는 사진과 박제가 닮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사진 박제'는 '나비 박제'와는 다르다. 만약 여러분께서 나비를 박제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나비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박제는 나비를 (실제로) 죽이지 않고도 죽일 수 있다. 마치 이상의 친구 구본웅이 이상을 (그림으로) 박제시킨 것처럼. 만약 나비 박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가장한) '죽은 시체'라면, 사진 박제는 '살아있는 시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비 박제는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에 놓여있다. 살아있는 나비와 박제된(죽은) 나비. 그러나 구본창의 '굿바이 파라다이스'는 삶/죽음이라는 대립구조로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시체'는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게 될 것이다.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나비'를 아시나요? 구본창은 유쾌하다. 사진 박제는 살아있는 나비를 죽이지 않고도 박제시킬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사진 박제는 삶/죽음이라는 딜레마라는 '문지방(이분법)'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액체가 (화선지) 피부에 스미면 위트와 패러독스가 서서히 출현한다.

구본창은 '여자'와 '연애'를 한다. 물론 그의 연애 기법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구본창의 연애 행각은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구본창은 파라다이스에서 노니는 나비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탕! 나비는 죽는다. 탕! 탕! 다른 나비가 꿈 속에서 죽는다. 탕! 탕! 탕! 또 다른 나비가 살아있는 시체가 된다. 구본창은 어느 인터뷰에서 '굿바이 파라다이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 작품도 신문이나 잡지에 난 토막 소식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자연사박물관의 곤충 상자의 형식을 취한 '굿바이 파라다이스' 연작도 1993년인가 신문에서 본 뉴스에서 시작됐어요. 나비 박사 석주명 선생의 누이동생 석주선 씨가 전쟁 통에 다른 물건들을 희생하며 지켜낸 죽은 오빠의 연구논문을 40년 만에 책으로 펴냈다는 소식이었죠. 그런데 석주명 박사는 전쟁 전에 수집한 나비 수천점을 다 태워버렸다고 해요. 기사가 준 충격이 평소 자연사박물관 이미지와 겹치면서 작업이 됐죠"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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