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그대여!

희뿌연 반달이 자작나무 우듬지에 걸린 수목원에서 저녁을 맞이합니다.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 촛불을 켜듯, 산골짜기를 타고 먹물처럼 어둠이 번지면 고요히 잠든 정원은 빛으로 피어납니다. 겨울밤은 온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춥지만, 오색별빛으로 하나둘 피어나면 어느새 온기로 훈훈해집니다.

천상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반짝이는 이곳. 수목원은 빛 축제로 술렁이지요.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움은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휘황한 별빛에 다가서면 온몸이 오색 물감으로 물들 것만 같은 황홀감에 젖습니다. 진주가 살을 에는 아픔과 상처의 결정체이듯, 내가 젖은 이 황홀경도 한 인간의 집념과 열정이 빚어낸 고통의 아름다움이겠지요.

겨울 산 찬 공기로 정수리가 서늘한 '행복의 터널'을 걸으며 그대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맹세한 사랑이 행복을 가득 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냥 오르는 줄만 알았지요. 시뻘건 용암 덩어리 같던 젊은 시절 사랑의 열정이 식어가고 구멍 난 의지가 현무암처럼 가벼워질 때 감성마저 무뎌지게 했습니다.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부부의 사랑은 그렇지 않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 이기적인 삶과 고집이 그대를 얼마나 오랫동안 외롭고 고통스럽게 했는지를요.

그대여!

테마 정원은 그야말로 마술의 세계이자 마법의 성입니다. '숲 속 동물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하늘길'을 걸으며 신화 속의 인물을 떠올립니다. 기기묘묘한 동물들의 형상과 쪽빛 하늘 바다 위 황금마차를 보니 천상의 명공인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가 생각납니다. 아폴론과 디프네를 위한 것인지, 연인 아프로디테를 위한 마차인지는 몰라도 한참을 서성이며 바라봅니다.

축제를 즐기는 인파에 묻혀 걸음을 옮기다 보니 황금마차에 이르렀습니다. 문득 그대와 함께 마차에 올라 천상을 날아오르며 사랑의 찬가를 불렀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주변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것을 왜 몰랐는지 후회스럽습니다.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도처에 보물들이 이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지요. 우리네 하루하루의 삶이 축제인 것을 내 자신만이 모르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지 위의 별빛을 볼 수 없는 건 그것을 바라보는 삶의 여유로움과 따스한 가슴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누구나 그곳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다.'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상은 오색별빛처럼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하늘에도, 땅 위에도, 바다 속에도, 심지어 내가 사는 지붕 위에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겠지요.

그대여!

연인들이 찾는 명소 중 명소인 '달빛정원'은 한마디로 환상 그 자체입니다. 신비로움과 엄숙함이 교차하는 예배당과 천사상 앞에서 비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불길처럼 뜨겁지는 않을지라도 늘 따뜻한 불씨를 간직한 꺼지지 않는 잉걸불처럼 이어지기를 빌었습니다.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의 안녕과 사랑을 위한 축원도 하였답니다.

시가 있는 산책로와 하경정원, 빛담길과 숲속의 터널을 지나 천년의 생과 향을 지닌 천년 향나무 앞에 섰습니다.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향기와 품격을 잃지 않는 비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소나무의 고귀한 절개와 시들지 않는 푸르름, 향나무의 긴 생명력과 지워지지 않는 천년향의 비밀과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과 우정, 추구하는 이상과 신념, 인간관계, 삶과 죽음 등을 생각하며 어떻게 사는 게 멋진 인생인가를 반문하였지요.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주인공 잭 니콜슨의 '열쇠 구멍 너머로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연기와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는 게 인생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그때 그걸 해봤더라면'이라더군요. 이제부터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대여!

강전섭 수필가

칠흑 속에서 빚어내는 빛의 향연에 흠뻑 취한 여행길은 영혼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찌든 일상의 더께를 털어내고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은 내 삶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답니다. 하지만 홀로 떠나는 여행은 하지 않겠습니다. 노을 진 석양이 빛나듯 그대와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더욱 튼실하고 보람 있는 삶의 여정을 가꾸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엔 그대와 함께 '행복의 터널'을 지나 호젓한 자작나무 숲길을 걷고 싶습니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빛담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소망을 쌓은 돌탑 무더기가 있는 개울가에서 따스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대여!

어둠이 물감처럼 풀어지며 빛바랜 창호지 사이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처음처럼 그대를 보고 싶습니다.


강전섭 약력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청주문화원 이사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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