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우리나라가 미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의 일이다. 이해 4월 6일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듬해 푸트(Lucius H.Foote)를 주한 초대 공사로 파견했지만 우리나라는 5년이 넘도록 주미 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국력이 허약한데다 청나라의 방해가 집요한 때문이었다. 결국 초대 주미 공사는 1887년 8월에 가서야 임명되었으나 부임은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11월에나 가능했다. 조선을 파고드는 일본의 지배권을 견제하기 위해 서구 열강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유도한 청은 정작 조선의 자주적 외교활동에는 기를 쓰고 방해했다. 조선이 그들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방자하기로 악명이 높던 청국 공사 원세개는 우리로선 참으로 모멸스런 논리를 앞세워 주미 공사 파견을 방해했다. 조선은 약소국이며 자주 능력이 없다는 것, 조선은 빈약하여 전권공사를 파견하더라도 재정난으로 곧 철수하고 말 것이라는 것, 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국'끼리의 외교관계를 도모한 조선과 미국의 주장은 좀체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참으로 해괴하고 굴욕적인 조건을 전제로 공사 파견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른바'영약삼단(?約三端)'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조선 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를 알현하고 청국 공사와 함께 국무부와 백악관을 방문한다. 둘째, 공적 행사나 사적 연회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 다음에 입장하고 아랫자리에 앉는다. 셋째, 중요한 사무는 먼저 청국 공사와 협의한 후 그 지시를 따른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대략 우리들 증조부나 고조부 대의 한.중관계가 이런 것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워 자다가도 깰 일이요, 분하고 억울하여 이를 갈 만한 일 아닌가. 와신상담(臥薪嘗膽), 더 이상 이런 치욕의 역사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섶나무 위에 자고 쓸개를 씹으며 살았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또 그러지 않았다. 5백 년 왕업을 무너뜨린 그 악습 그대로, 무리 짓고 패 갈라 싸우는 일에만 몰두하여 금쪽같은 세월을 허비했다. 아주 잠깐, 앞선 문물을 뽐내며 '중국 러시'를 이루어 마구잡이 외화를 뿌려대던 때가 있었지만 상황은 급전하여 국가 경제가 통째로 중국의 볼모가 된 지 이미 오랜 형국이다.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의 망언은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이 망언이 '빅2'의 두 정상들이 나눈 한담 속에 우연히 튀어나온 말일 리 없다. 치밀하게 계산되고 다분히 의도된 말일시 분명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한국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의 일부이다. 그러니 당신네(미국) 혼자 한국 문제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양 북핵 문제를 가지고 우리(중국)를 압박하지 말라'. 한국에 대해서는'예나 지금이나 너희는 여전히 우리의 속국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감춰져 있다. 2007년 마무리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수·당과 벌인 전쟁을'내란'으로 규정한 터에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그처럼 왜곡된 역사인식이 최고 지도자의 입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머리털이 일어서는 느낌이다. 우리로선 국가 존망의 문제일 수도 있는 '사드'배치를 시비하여 '대국'답지 않은 보복극을 벌여온 저들이 지난 달 28일 극히 제한적인 한국 단체관광 허용 조치를 취했대서 관련업계가 잔뜩 기대에 부풀고 있는 모양이다. 더 이상의 사드 배치는 없다고 약속했다던가. 굴욕적인 제2의'영약3단'은 설로만 전하고 있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통탄스럽기로야 130년 전의 사정과 다를 바 없으나 중국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소홀히 해 온 우리들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강자가 베푸는 자비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이 전제되거나 담보된 경우에 한한다. 국권이 위태롭던 구한말의 지식인들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서 길을 찾고 자강을 절규했지만 도로에 그치고 만 결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뿌리깊은 사대의식은 우리 속에 아예 육화되기라도 한 것일까. 역사를 왜곡하고 도둑질해도 앉아 당하기만 하고, 시진핑 망언에는 정부도 국화도 그 흔한 항의 성명 하나 없었다. 연일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채 혹은 미국의 책임을 탓하고 혹은 대통령의 실정을 성토하던 그 많은 촛불은 또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일본에는 운동 경기 하나를 져도 못견뎌하고 미국에는 현대사의 모든 책임을 지워 탓하면서도 중국의 오만과 횡포에는 더없이 관대한 그 뿌리깊은 우리 안의 사대의식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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