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중략)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암울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길을 찾아 나서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논도 들도 산도 강도 소리 없고 생기 잃은 지 오래다. 이 땅에 희망이 있는지 답답하고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뒷걸음질 치면 죽음의 나락이고 절망의 계곡이기 때문이다.

1893년 3월. 북풍한설 몰아치는 어느 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그리고 충청도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봇짐을 머리에 이고, 허리에 차고 보은 장내리 들녘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림잡아 2만 명은 족히 되지 않을까.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쌀농사 밭농사를 짓던 순수한 농민이었다. 일제의 침탈에 온 나라가 피멍 가득하고, 서양 제국주의에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다. 이 와중에 탐관오리의 부패는 가렴주구(苛斂誅求),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그래서 농민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 민족의 얼을 살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다.

보은 장내리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운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사통팔달의 도로에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형세였다.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백두대간의 물줄기가 흐르며, 그 사이로 드넓은 논과 밭과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동학의 대도소(大都所/동학의 사무를 총괄하는 기관)가 있었다. 교주 최시형도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농민들은 짐을 풀고 움막을 지었다. 인근 하천의 작은 돌로 성을 쌓고 자신들의 임시거처를 만들었다. 생각해보라. 2만여 명이 운집해 있을 장내리 들녘을, 한 맺힌 사람들의 함성을,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는 이들의 눈물을. 계절은 봄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아니, 빼앗긴 들에 봄이 온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동학에 대한 박해가 안팎으로 거세지면서 운신의 폭이 갈수록 좁아졌다. 그렇지만 빼앗긴 봄을 되찾겠다는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청년 백범 김구도 이곳을 다녀갔다. 최시형 교주와 머리를 맞대고 구국의 지혜를 모았다. 자주독립과 우리 민족의 정신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목숨바칠 것을 결의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아에 허덕이고 질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것은 총이 아니라 낫과 삽자루가 전부였다. 총을 든 왜군들과 싸운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이었지만 온 몸으로 맞서 싸웠다. 마을 전체가 핏물로 가득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했다. 더 이상 보고만 있지 말자며 전국의 동학농민 수천 명이 보은 장내리와 인근 북실마을로 다시 모였다. 경복궁 침탈 후 처음으로 열린 농민 봉기였다. 농민들은 이곳에서 성을 쌓고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렇지만 혁명은 항상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식량도 부족하고 오랜 전투에 지쳐 적들과의 싸움은 속수무책이었다. 북실마을 주변 산에는 봉기에 가담했던 농민들의 주검으로 가득했다.

동학은 전라도 고부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며 시작됐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역사상 최초로 농민주도로 지방자치를 실현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이곳 충북 보은에서 활화산처럼 불 타 올랐다. 전봉준에서 최시형으로, 다시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 기개와 정신을 받들어 정의로운 세상,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명심할 일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외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이자 삶이며 가야할 길이다.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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