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처럼 강직한 길, 일제에 저항한 길

1924년 2월 어느 날. 충북도지사 박중량은(일본명 호추시게요·朴忠重陽)는 속리산의 법주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을 순례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북풍한설이 매서웠다. 길은 험하고 멀어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그렇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다. 속리산의 절경을 보고 사찰에 들러 고승들과 차담(茶啖)도 나누고 싶었다. 꽃이 피는 봄이 오기 전에 속리산 일대와 화양계곡까지 유람할 생각이었다.

말티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래야 법주사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이 험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도저히 차가 이 고개를 넘어갈 수 없었다. "소를 끌어오너라. 도지사인 내가 어찌 흙을 밟을 수 있겠는가." 박중량은 인근 마을에서 끌고 온 소를 타고 말티고개를 넘었다. 소나무 가득한 그 길을 온 몸으로 품으며 "천하제일의 절경이다.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넓혀야겠다."고 말했다.

박중량의 지시가 떨어지자 보은군수 김재호는 부역을 시작했다. 인근 주민 수천 명을 동원하는 당대 최대 규모의 부역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피는가 싶더니 벌써 여름의 길목에 서 있었다. 농번기에 주민들은 일손이 모자랐다. 게다가 더위가 시작되고 장마철까지 겹쳐 농사와 부역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도지사의 분부라며 다그치는 일본인 순사들이 마뜩치 않았다. 순사들은 게으름 피운다며 몇몇 부역자를 폭행까지 했다. 늦게 오는 사람들에게는 잔일까지 시켰다. 이러다가는 농사도 망치고 사람들의 몸도 피폐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달빛조차 숨죽이던 어느 날 밤, 주민 수백 명이 의기투합해 일본인 순사들을 산속으로 끌고 갔다. 손에 쥐고 있던 삽과 쟁기자루로 두들겨 팼다. 온 몸에 피멍이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북도청 경찰부 순사들이 총출동했다. 주민과 경찰이 맞서 싸웠다. 주민 상당수가 폭행죄로 옥살이를 했다.

말티고개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구경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야 했지만 너무 험했다. 수행원들은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렇지만 왕건은 이 길을 꼭 넘어가고 싶었다. 높고 푸른 대자연의 기상을 옴 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주민들을 시켜 박석 돌을 깔았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이곳을 지나 법주사와 신미대사의 복천암을 들러 여러 날 머물렀다. 말티고개를 넘어 법주사로 향하는데 소나무 가지가 늘어져 임금이 탄 연(가마)에 걸리게 되었다. 이를 본 한 신하가 연이 걸린다고 소리를 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렸다. 법주사에서 돌아오던 임금은 다시 이 소나무 곁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임금은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세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소나무에 정이품이라는 큰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말티고개는 오랜 세월 진하고 애틋한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고개다. 왕들이 사랑한 고개다.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이 어디 사람뿐일까. 날짐승 들짐승도 이 고개를 넘나들고 있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도 말티고개의 다정한 벗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환상을 쫓고 더 큰 꿈을 찾아 나선다. 이 고개를 넘으면 기분 삼삼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고개에는 쑥부쟁이 같은 추억도 있고 망초꽃 같은 슬픔도 있다. 소나무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딤으로 단련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아, 굽이치는 고갯길과 정적의 숲을 보라. 춤추고 노래하며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내뿜는 저 신비를 보라. 답답했던 가슴에 솔잎향 가득하다. 그 푸른 기운으로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리라.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보은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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