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산다는 것이 때로는 쉼표도 필요하고 간혹은 도돌이표도 필요한 것 같다. 나에게 겨울바다는 늘 한적함이 주는 몇 가지 느낌으로 기억된다. 모처럼 나는 겨울휴가를 얻어 매서운 겨울바람이 한창인 남쪽바다 섬마을을 찾아갔다. 휴일을 맞은 어선들이 정박해있는 욕지도의 해변을 걸으며, 올여름의 생활들을 더듬어 보고 다가올 새해를 위해 차분히 생각에 잠길 때 쯤 문득 하얗게 깨지는 포말을 차고 나르는 갈매기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머리를 들어 또 다른 물새들의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들의 노래는 수많은 추억이 사라지지 않은 뇌리를 덮으며 날아가고 날아오다가도 일순 조용해졌다. 그 순간에 생긴 오롯한 적막 속에서도 혼자 조그맣게 노래하는 새들도 여럿 있었다. 때 이른 겨울나무에서는 서둘러 붉은 꽃을 터트린 동백꽃이 눈에 들어온다. 손닿을 듯이 가까운 허공에서 부리를 움직이며 내는 소리는 동종의 새들끼리의 대화지만 내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였다. 분명 한 마리 새가 제 흥에 겨워 노래하는 소리였다. 산속 절간의 풍경소리 보다 맑은 소리다. 바다에 흔한 갈매기의 소리는 다른 많은 새들의 활기찬 노래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분명 일부러 다른 새들이 전혀 울지 않을 때만 우지는 않았을 터이다. 내가 본 바닷새의 이름이 혹시 동요에 나오는 물총새는 아닐까? 물총새라고 부르기로 하자마자 물총새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날아오는 많은 새들이 저마다 활기차게 내지르는 노래는 고동소리를 울리는 키 작은 어선에서 나오는 고동소리에 묻혀 버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파랑새를 겨울 섬에서는 볼 수 없었다. 지난 청주공예비엔날레를 찾아와준 마을이장의 안내로 해안가를 산책했다. 그곳에는 여러 갈래의 좋은 길이 있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 함께 갔던 바다와 섬이지만, 이제는 함께 올수도 없도록 늙어 버리신 노모를 만든 세월이 야속하다. 그 섬에는 소나무가 많았다. 경북 안동이나 봉화 같으면 왕릉이 나올 법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고개 위에 오르니 멀리 해금강의 마을이 보인다. 그곳도 새삼스레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어디엔들 머무를 곳 없으랴' 라고 읊었던 시인 최영해가 떠오른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워 올리는 안개의 향연(香煙)은 마치 자식을 위해 저녁밥을 준비하는 아낙네의 마음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며 출렁다리가 놓인 욕지도의 전망대 고개 마루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완만한 오솔길이 보였다. 때때로 마을 주민들이 나뭇가지와 솔 갈비를 걷으러 다니는 길같이 보였다. 어쩌면 연인들과 동네 어린이가 어제 함께 걸었던 길일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앞길을 그려본다.

숲길에는 특별한 향이 가득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 속에서 문득 방울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끔 그 소리는 이내 바람 속에 묻혔고 바람이 그쳐도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저 섬 너머에도 섬들이 있다. 통영의 바다는 570개의 섬들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섬들의 얼굴을 내 마음에 새겨질 정도로 자세히 보지 못한다. 내 상상은 어떤 초상화로 이어졌다. 얼굴이 생략된 여성의 초상화. 눈도 코도 입도 눈썹도 없는데 희미한 귀의 윤곽만 보이는 초상화. 그 화가가 누군지조차 잊었는데 그 초상화가 떠오르다니! 나는 그 초상화를 실제로 본 적이나 있는지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의심하면서 소나무 옆 바위에 앉아 있었다. 겨울 들판에도 농부들이 일하러 나오고 있었다. 소를 앞세워 쟁기질 하는 농부는 아니지만 그들의 봄은 무척이나 바빴을 것이다. 새들이 그 뒤를 따르며 땅속에서 나온 벌레를 쪼아 먹고 있었을 것이다. 새들은 자유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새들이 내게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주었으나 헛일이었다. 나는 바다사진을 찍느라 뒤를 돌아 볼 여유는 언제나 없었다. "이 길로 쭉 가면 문화도시를 만나나요?" "글쎄요. 바위는 언제나 위험하니까 일행과 같이 숙소로 가요." 해금강과 떨어진 욕지도는 통영이라는 문화도시의 조각품일까? 의문하며 아직은 여전히 차갑고 냉랭한 겨울바다를 시선하였다. 휴가는 문화에 대한 기대감도 섬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도 없었다. 다만 내가 살아온 궤적이 또는 지역에서 나의 문화와 관련한 활동이나 태도가 겨울바다의 새들의 울음처럼 또 때로는 외국어 혹은 파랑새를 찾는 것처럼 지역민에게 들리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자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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