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충북 100경 - 정지용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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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7.12.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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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젓어 부르는 고향의 노래
정지용 생가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했다.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어깨 너머로 한의학을 공부했고 좋은 약재를 고르는 법도 배웠다. 그래서 시골집에 한약방을 차려놓고 약재를 팔거나 아픈 사람 진맥을 보고 처방도 했다. 언제나 시골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디 아픈 사람만 찾아왔겠는가. 나라가 수상하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찌해야 할지 도원결의하는 다락방도 있었다.

어머니는 꽃가마를 타고 시집왔다. 언제나 곱고 순했으며 다정하고 인정이 많았다. 한약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 겨울에는 땅속 깊이 묻어둔 옹기에서 백김치를 꺼내 고구마와 감자를 대접했다. 정 없으면 꽁꽁 언 고염이라도 한 접시 먹고 가도록 했으며,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서는 주먹밥을 싸 주기도 했다.

정지용 생가 앞 실개천

마을 앞에는 실개천이 있었다. 넓은 벌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이었다.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그곳에 작은 도랑이 있고 도랑가에는 옹달샘도 있었다. 그 옆에 집이 있었다. 납작하게 엎드린 작은 초가집이었다. 저 멀리 소나무 숲 가득하고 하늘은 낭창낭창 맑게 빛났으며 들녘은 풍요로웠다. 아버지는 한약방 일만 하지 않았다. 농사도 지었고 들녘에서 수확한 것으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누었다. 아버지는 쟁기지고 논두렁을 걷고, 아들은 얼룩백이 소를 몰고 뒤를 따라갔다. 농번기에는 부지깽이도 한 몫 한다. 아이들도 학교를 가지 않고 들로 나갔다. 가을걷이를 할 때는 소달구지에 청춘을 싣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이 이곳에서 바람처럼 햇살처럼 꽃처럼 나비처럼 뛰어 놀았다. 논두렁 밭두렁, 산과 들이 학교였다. 도란도란 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실개천의 올갱이, 심산유곡 가재, 머루와 딸기, 돌담길과 졸음에 겨운 낭만 고양이 모두 벗이고 사랑이었다.

어린 소년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해 여름 하늘이 뚫린 것처럼 엄청난 비가 왔고 실개천은 범람해 초가집을 덮쳤다.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벌은 돈을 제다 이웃에 빌려주었으니 집고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학교도 갈 수 없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어머니는 늘 책을 읽어 주었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어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실개천 너머의 마을길과 꽃피는 대지를 따라 걸으며 당신의 마음샘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조근조근 건네주었다. 문화지리학이라고 했던가. 내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미래가 바뀌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굽이 고개가 있으니, 아들아. 견뎌라.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 너의 길을 올곧게 가거라." 어머니는 이 한 마디의 씨앗을 아들의 마음에 심었다.

서울로 올라갔다. 이 일 저 일 안한 것이 없었다. 주경야독, 독학으로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1학년 때 '요람'의 동인을 결성했다. 2학년 때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다.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과 문학활동에 심취했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서정적이고 고향에 대한 아련함으로 가득했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통해 서구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관한 논문을 쓰고 대학을 졸업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이후에도 인도의 타고르와 중국의 한시 등 명상과 동양사상 에 심취했다. 그러면서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이 되어 아름다운 우리 글, 우리 시 짓기에 몰두했다.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과 아련한 추억과 사랑을 시심에 담았다. 김기림,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에 참여했다. '카톨릭청년'의 편집을 맡으면서 신앙심 깊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기에 더욱 값지다고 생각했다.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박남수 등 뒷날 한국 시단의 기둥들도 그의 시적 표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의 시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의 서정시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자연과 생명과 우리 고유의 정서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연마했다. 그의 이름은 정지용. 순수예술에 몰두하던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좌익단체에 가입했다. 한 때 일제에 마음을 둔 것을 반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6·25전쟁 때 납북된 이후 그의 소식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지금 그의 고향 옥천에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다.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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